애창시(96) 비망록(1963) 김경미(1959~)

애창시(96)

 

비망록(1963)                                                          김경미 (1959 ~ )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神은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 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굵은 잇몸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 줄는지아무 일 아닌 듯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김경미
시인 김경미 사진 (m.blog-네이버에서 옮김)

(약력)

서울특별시 출생
데뷔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비망록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석사과정 수료
한양대학교 사학 학사

2005 5회 노작문학상
2007 한국방송작가협회 라디오작가상
2010 4회 서정시학작품상

 

 

 

 

 

김경미

(해설)

누구든 삶의 중요한 골자를 적는 하나의 비망록을 갖고 있다()의 사건은 낙차가 있고중립(中立)이 없으므로그 자체로 강렬하지 않은 생()의 시간은 없다어떤 과거는 해약하고 싶어진다어떤 과거는 지금에라도 더 꽃피우고 싶어진다어느 때는 폭풍이 지나가는 바닷가처럼 스산하고 절벽처럼 위태위태해 시큰한 냉기가 돌기도 한다어느 때는 사랑이 붉은 가슴에게로 오지만 눈물의 손바닥이 얼굴을 덮는 밤도 있다우리는 이 사건들을 모두 속기할 수는 없다갈피를 잡지 못해 헤매는 미망(迷妄속에 살면서 잊을 수 없는 미망(未忘)만을 기록할 뿐.

김경미(49) 시인의 데뷔작인 이 시에는 스물네 살에서 스물다섯 살로 넘어가는 나이의섬세한 감성을 소유한 여성이 등장한다()은 그녀의 절망을 구원하지 않았고그녀가 만나는 이들은 팔뚝으로 눈물을 훔쳤으며, ‘산두목 같은 사내는 끝내 그녀의 사랑이 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그러나 젊은 열정이 어딘들 못 나서랴.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그예 젊은 열정은 생의(生意)를 내는 것마치 견고한 배는 풍랑에도 해를 입지 않듯이.

미래에 대한 이 적극적인 의욕은 시 〈겨울 강가에서〉에도 드러난다. “딸아 기다림은 이제 행복이 아니니오지 않는 것은가서 가져 와야 하고빼앗긴 것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이란 없으니네가 몸소 가지러 갈 때이 세상에닿지 않는 곳이란 없으리“. 그러나이 굽히지 않는 마음이 20대의 젊음에게만 있을쏜가우리는 또 내일을 만나고내일은 공백(空白)의 페이지이고내일은 새롭게 써야 할 비망록인 것을.

고형렬 시인의 표현대로김경미 시인은 맵차고도 직정적인 여성시인이다그녀는 자기 혐오와 자기 부정을 통해 자신과 전면전을 치르는 시인이다해서 그녀의 시는 이 세상의 패악함과 간활함에 맞선다시 〈나의 서역〉의 도발적인 허무는 또 어떤가. “서로 편지나 보내자 삶이여실물은 전부 헛된 것만나지 않는 동안만 우리는 비단 감촉처럼 사랑한다 사랑한다 죽도록만날수록 동백꽃처럼 쉽게 져버리는 길들실물은 없다 아무곳에도가끔 편지나 보내어라“. 이렇게 솔직하게 속내를 꺼내 보이는 시를 읽고 나면 우리는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다시 만나 동백꽃처럼 모가지를 꺾으며 서로를 외면하게 될지라도다시 만나 과거의 비망록을 다시 열람하려는 용기그것이 우리의 가슴에 아직 남아있는 그리움 아니겠는가.

(참고자료)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6(조선일보 연재, 2008)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집『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쓰랴』(실천문학사,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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