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11)  대설주의보 <1983년> 최승호(1954 ~ )

애창시(11)

 

대설주의보 <1983년> 최승호(1954 ~ )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이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다,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다,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시인 최승호 사진 (google image에서 발췌)

[최승호 시인]
1954년 9월 1일 강원도 춘천 출생. 춘천교육대학을 졸업했다. 1977년 『현대시학』에 시 「비발디」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82년 「대설주의보」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였다. 상징성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상황의 복합적인 양상을 그 나름대로 사실적으로 표현한 『대설주의보』(1983), 자연에서 취한 시적 소재를 통해 삶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 『세속도시의 즐거움』(1990), 문명의 소란함과 참담함으로 현대 도시문명의 폐해를 그린 『그로테스크』(1999), 산문시와 시행이 구분된 형태를 교차하는 표현형식으로 소멸의 과정을 겪어내는 사물들의 자취를 탐색한 『모래인간』(2000),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2003) 등의 시집을 간행하였다.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소멸‧파괴‧고통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고발할 뿐만 아니라 현실과 자아의 양태를 세밀하게 드러냄으로써 죽음과 허무의 미래관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그의 비극적 현실인식은 환경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있어 흔히 생태시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김영승

 

[해설]

눈은 어떻게 내리는가. 어디서 오는가. 어디로 사라지는가. 머언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내리는 김광균의 눈이 있는가 하면, 쌀랑쌀랑 푹푹 날리는 백석의 눈이 있다. 기침을 하자며 촉구하는 김수영의 살아있는 눈도 있고, 희다고만 할 수 없는 김춘수의 검은 눈도 있다. 괜, 찮, 타, 괜, 찮, 타, 내리는 서정주의 눈도 있고, 갑작스런 눈물처럼 내리는 기형도의 진눈깨비도 있다.

그리고 여기 ‘백색계엄령’처럼 내리는 최승호(54) 시인의 눈이 있다. 1980년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념의 시대였고 폭압의 시대였다. 그는 ‘상황 판단’이라는 시에서 ‘굵직한/ 의무의/ 간섭의/ 통제의/ 밧줄에 끌려다니는 무거운 발걸음./ 기차가 언제 들어닥칠지 모르는/ 터널 속처럼 불안한 시대’라고 일컬었다. 그의 시는 선명하고 섬뜩하게 ‘그려진다’.

‘관(觀)’과 ‘찰(察)’을 시 정신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현실을 ‘보면서 드러내고’, 자본주의와 도시문명을 ‘살피면서 사유한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골짜기에 눈은, 굵게 힘차게 그치지 않을 듯 다투어 몰려온다. 눈보라의 군단이다. 도시와 거리에는 투석이 날리고 총성이 울렸으리라. 눈은 비명과 함성을 빨아들이고 침묵을 선포했으리라. 백색의 계엄령이다. 쉴 새 없이 내림으로써 은폐하는 백색의 폭력, 어떠한 색도 허용하지 않는 백색의 공포! 그 ‘백색의 감옥’에는 숯덩이처럼 까맣게 탄 ‘꺼칠한 굴뚝새’가 있고, 굴뚝새를 덮쳐버릴 듯 ‘눈보라 군단’이 몰려오고, 그 군단 뒤로는 ‘부리부리한 솔개’가 도사리고 있다.

분쟁과 투쟁, 공권력 투입, 계엄령으로 점철됐던 시대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골짜기에 굵은 눈발이 휘몰아칠 때 그 눈발을 향해 날아가는 굴뚝새가 있었던가. 덤벼드는 눈발에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췄던가. 꺼칠한 굴뚝새의 영혼아, 살아있다면 작지만 아름다운 네 노랫소리를 들려다오! 다시 날 수 있다면 짧지만 따뜻한 네 날개를 펼쳐 보여다오!

 

[참고문헌]
–  최승호 [崔勝鎬]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 (현대시 100년 –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편 중에서

 

(편집부) 2000hans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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