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12)
저녁눈 <1991> 박용래(1925 ∼ 1980)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박용래 시인]
박용래의 본관은 밀양(密陽). 충청남도 논산 출신. 아버지는 박원태(朴元泰)이며, 어머니는 김정자(金正子)이다.
1943년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조선은행에 입행하여, 1944년 대전지점으로 전근하였다. 1945년 8·15광복을 맞아 사임하고, 1946년에 일본에서 귀국한 김소운(金素雲)을 방문하여 문학을 배웠다.
그 뒤 향토문인들과 ‘동백시인회(柊柏詩人會)’를 조직하여 동인지 『동백(柊柏)』을 간행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48년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문학 수업을 계속하여 1955년 6월호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로 박두진(朴斗鎭)의 첫 추천을 받았고, 이듬해「황토길」·「땅」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1969년에 한국시인협회가 주관하여 발간한 『오늘의 한국시인선집』 중 하나인 첫 시집 『싸락눈』을 출간하였다.
이어, 한국시인협회 주선으로 1971년에는 한성기(韓性祺)·임강빈(任剛彬)·최원규(崔元圭) 등의 시인과 함께 동인시집 『청와집(靑蛙集)』을 출간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전원적·향토적 서정의 세계를 심화, 확대시킨 것이 특징이며 언어의 군더더기를 배제하여 압축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저녁눈」은 이러한 특성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기타 저서로는 시집 『강아지풀』·『백발(百髮)의 꽃대궁』, 유고시집 『먼 바다』(1984)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1985)이 있다.
1974년 한국문인협회 충청남도 지부장에 피선되었다. 1961년 충청남도 문화상, 1969년현대시학사(現代詩學社)가 제정한 작품상을 수상하였고, 죽은 뒤 1980년에 한국문학사(韓國文學社)가 제정한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84년 10월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에 그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해설]
겨울에 여행을 떠난 화자는 저녁 때가 되어 허름한 주막에 찾아 든다.
저녁을 먹고 우연히 바깥을 바라보는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한가하던 주막은 갑자기 활기를 띠고 바빠진다.
주막임을 표시하는 희미한 호롱불과 마굿간에 매어 있는 조랑말의 수선스런 움직임,
온종일 짐을 지거나 주인들을 등에 태워 고단하고 시장할 조랑말을 위해 부산하게
여물을 준비하는 주인들. 이런 모습을 바라보며 화자는 바쁨 속의 한가함 혹은
한가함 속의 바쁨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인적이 끊긴 허허벌판에서 휘몰아치는
눈발을 묘사한 마지막 연은 날이 새면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할 나그네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참고문헌]
– 박용래 [朴龍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2]- (『먼바다』.창작과비평사. 198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