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14)
한계령을 위한 연가<1996> 문정희(1947 ~ )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시인 문정희)
문정희(文貞姬, 1947~ )의 시는 여자들에게 살과 피를 주고, 잃어버린 욕망을 되찾아준다.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문정희는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하며 문단에 나온다. 이제까지 그는 『문정희 시집』(1973), 『새떼』(1975),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1984), 『아우내의 새』(1986), 『찔레』(1988),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1988), 『제 몸속에 살고 있는 새를 꺼내주세요』(1990),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1992), 『남자를 위하여』(1996) 등의 시집을 펴낸 바 있다. 1975년에는 ‘현대 문학상’을 받고, 1996년에는 ‘소월시문학상’을 받는다.
시인은 일찍이 진명여고 시절부터 각종 백일장을 석권하며 문명(文名)을 휘날렸다. 십대 때 이미 첫 시집을 낼 정도로 조숙했던 시인은 미당 서정주의 문하에 들어 시를 배운다. 모국어의 장인은 이 감수성의 천재에게 언어를 다루는 법을 전수한다. 문정희 앞에 열린 시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시인은 순조롭게 등단을 하고 시집을 내고 이름을 널리 알렸다.
문정희의 초기 시에 해당하는 「떠오르는 방」은 관능을 노래하는 시다. 김정란은 문정희의 시를 두고 “퍼내도 퍼내도 들끓는 내면의 용암”1)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관능의 용암이다. 그 관능의 용암은 남성 중심주의 사회의 억압에 짓눌려 속에서만 들끓고 있다. 문정희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여성성은 아직 “누워” “남자를 기다”리고, “부끄러운 머리채를 이끌며” “어둠과 함께 도망”치는 수동적 여성성이다.
문정희의 시에서 여성은 소외의 존재이자 무엇을 박탈당하는 존재다. “시아버지는 내 손을 잘라가고 / 시어미는 내 눈을 도려가고 / 시누이는 내 말을 뺏어가고 / 남편은 내 날개를 / 그리고 또 누군가 내 머리를 가지고 / 달아”(「유령」)난다. 여성 주체를 둘러싼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에게서 “잘라가고”, “도려가고”, “뺏아”간다. 이처럼 여성은 빼앗기는 존재, 잃어버리는 존재다. 따라서 여성은 마침내 지워진 존재, 즉 “유령”이 된다. 이 유령은 방에 유폐되어 웅크리고 있거나, 꿈틀댄다.
문정희의 시적 싸움은 타인들에 의해 오독된 제 운명과의 싸움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이 곧 예술가의 성공은 아니다. “지난밤의 외로움을 바다 끝까지 밀고 나아가 / 심연에 살며 / 불온한 천재로 자꾸 태어나기를 기다렸다”(「유명한 예술가」) 시인은 심연을 사는 불온한 천재를 꿈꾼다. 그가 불온한 것은 세계의 가난에 대해 도발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편함에 노예처럼 길 드는 정주민이 아니라 “날마다 길을 떠나는 집시”, “화적 떼의 아내”, “하다못해 혈혈단신 화전민”으로 살고 싶어 한다(「집시가 되어」).
나 떠난 후에도」는 죽음을 빌려 살아 있음의 ‘기쁜 슬픔’을 찬양하는 시다. 시인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에 대한 예감들을 타오르는 불로, 생명 됨의 연옥(煉獄) – 꿀 같은 죄와 악마들 – 으로 바꾼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균질화된 수난의 자리였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그는 정치적 자각이 있든 없든 정치적으로 디아스포라 소수자에 속할 수밖에 없다. ‘바깥’으로 나온 자는 불가피하게 소수자로 떠돌며, 그의 언어는 방언이 된다. 물론 슬픔의 뿌리는 ‘안’이 될 수 없는, 끝내 ‘바깥’으로만 떠돌아야 하는 자의 수고,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외로움과 불안과 불행에 가 닿을 것이다. 「보석의 노래」에서 슬픔은 두 겹이다. 떠나온 땅과 수난 속에 있는 사람들, 억울하게 죽은 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비롯된 슬픔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디아스포라 소수자로 피차별적 신분으로 살아야 하는 ‘나’의 처지에서 비롯된 슬픔이다. 이 슬픔이 낳은 것은 노여움과 분노이다. 노여움과 분노가 타자의 위로를 거절하게 했을 것이다.
“만지지 말아요. / 이건 나의 슬픔이에요.” 그러나 슬픔을 자기 자신 속에서 그것의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그것은 그것 뒤에, 그것 아래, 그것 밖에 그것을 내놓는다.3) 슬픔의 가시적 실체인 울음은 이미 슬픔을 극복한 징후다. 언제나 슬픔은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힘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슬픔은 ‘나’의 안에서 “영롱”해지고, 마침내 “시리도록 눈부신 광채”를 가진 보석으로 변한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이럴 때 울음은 짝없이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지려는, 혹은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안타까운 몸짓이다, 울음은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의 존재증명이다. “우는 날이 많았다”는 것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이다.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자의 심장을 핥아봐라, 슬픔의 짠맛이 날 것이다. 우는 일은 사랑으로 빚어지는 슬픔을 씻기 위한 씻김굿이다.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 무성한 사랑으로” 서려면 이 씻김굿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픔이 출렁거리던 날들, 그토록 많이 울던 날들도 다 가고, 이제 ‘찔레’는 무성한 사랑을 꽃피운다. 마침내 ‘찔레’는 잘-있음의 현실태요, 자기동일성을 회복한 온전한 삶의 표상이다.
[해설]
이 겨울에 사랑이 찾아온 연인들에게 이 시를 읽어보라고 권한다. 우선 어렵지가 않다. 쉽고, 리듬이 있어 흐르는 물처럼 출렁출렁한다.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눈이 쌓여 무게가 생기듯이 어느 순간 이 시는 우리들의 가슴께를 누르며 묵직하게 쌓이기 시작한다.
한 편의 시를 읽는 경험에도 ‘뜻밖의 폭설’은 내린다. 폭설이 내려 우리는 압도되어 이 시 안에 고립된다. 큰 고개를 넘으면서 느닷없는 폭설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사실 좀 도발적이다. 우리는 그 불편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못 잊을 사람하고’ 폭설에 갇히고 싶다고 말한다. 폭설에 갇히는 것이 고립의 공포로 엄습해오더라도. 사실 사랑만이 실용적인 것을 모른다. 사랑은 당장의 불편을 모른다.
모든 사랑은 고립의 추억을 갖고 있다. 서랍 깊숙이 넣어둔 연애편지가 있거든 꺼내서 다시 읽어보라. 연애편지는 고립의 기억, 고립의 문장 아닌가. 둘만의 황홀한 고립. 그러니 사랑에게 고립은 고립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지속시키는 한 기꺼이 고립을 선택할 것이다. 그것이 후일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무너뜨리더라도. 그것이 모든 길을 끊어 놓더라도. 사랑은 은밀하고, 은밀해서 환하다.
문정희(61) 시인은 여고 시절부터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었다. 백일장 당선시들을 모아서 여고 3학년 때 첫 시집을 냈다. 타고난 재기를 미쁘게 본 미당 서정주 시인이 시집의 서문을 썼고, ‘꽃숨’이라는 시집 제목도 달아주었다. 그녀는 여성의 지위와 몸을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가두려는 것들을 거부하면서 한국시사에서 ‘여성’을 당당하게 발언해왔다. 그러면서 여성 특유의 감수성으로 사랑의 가치를 활달하고 솔직하게 표현해왔다.
‘한 사람이 떠났는데/ 서울이 텅 비었다’라는 그녀의 문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랑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활동이다.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있어보라. 사랑은 소멸하고 말 것이다.”
[참고문헌]
– 문정희 [文貞姬] – 현대에 되살아난 “매창”의 목소리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나무이야기)
–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4]
– 시집『남자를 위하여』(민음사, 1996)
–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9』(국립공원,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