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16)  우리가 물이 되어 <1987>강은교(1952 ~ )

애창시(16)

 

우리가 물이 되어 <1987>    강은교(1952 ~ )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라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서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사진 김경미(m.blog-네이버에서 옮김)

 

1945년 12월 13일 함남 홍원 출생.

서울에서 성장하면서 경기여중‧고와 연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이 당선됨으로써 시단에 등단하였다.

이후 김형영(金炯榮)‧ 윤상규(尹常奎)‧ 임정남(林正男)‧ 정희성(鄭喜成) 등과 함께 『70년대』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작활동을 하였다. 초기의 시에서는 시적 대상의 인식 자체가 존재의 차원을 넘어서는 허무의 관념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은 첫 시집 『허무집』(1971), 『풀잎』(1974), 『빈자일기(貧者日記)』(1978)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의 중반기로 접어들어서도 시인의 감성은 더욱 정교한 감각의 언어와 표현을 획득하면서 날카로워지고 있다.

시집 『소리집』(1982), 『우리가 물이 되어』(1987), 『바람 노래』(1987), 『슬픈 노래』(1989),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89), 『벽 속의 편지』(1992), 『어느 별에서의 하루』(1996)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업적들이다. 그런데 시집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1999)에서부터 시인의 일상의 경험을 시적으로 변용하는 데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인 상상력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감각과 인식을 중시하던 시적 경향이 사색과 성찰의 경지로 더욱 넓고 깊어졌음을 말해준다.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2002), 『초록 거미의 사랑』(2006)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강은교의 시 세계는 허무의식을 통하여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던 초기의 시로부터 점차 민중적이며 현실적인 시각에서 시대와 역사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로 폭넓게 전개되고 있다.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했고, 1992년 현대문학상 시부문상을 받았다. 1997년 PSB 문화대상 문학부문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제18회 정지용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시집으로는 『허무집』(1971), 『풀잎』(974), 『빈자일기』(1977), 『붉은 강』(1984), 『슬픈 노래』(1988), 『어느 미루나무의 새벽노래』(1988), 『순례자의 꿈』(1988),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1989), 『그대는 깊디깊은 강』(1991, 시선집), 『벽속의 편지』(1992), 『어느 별에서의 하루』(1996), 『사랑비늘』(1997), 『가장 큰 하늘은 그대 등 뒤에 있다』(1999, 시선집),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1999),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2000, 시화집),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2002), 『초록거미의 사랑』(2006), 『네가 떠난 후에 너를 얻었다』(2011),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나는』(2013)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추억제』(1975), 『시인수첩』(1980), 『누가 풀잎으로 눈뜨랴』(1984), 『허무수첩』(1996), 『달팽이가 달릴 때』(1997), 『사랑법-그 담쟁이가 말했다』(2004) 등이 있고, 동화집 『하늘이와 거위』(1994), 『저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1996), 『삐꼬의 모험』(1997) 등도 펴냈다. 박사학위 논문인 『1930년대 김기림의 모더니즘 연구』(연세대, 1988)과 시창작론인 『시창작실습』(2002), 시 해설집 『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2005) 등이 있다.

[해설]

강은교의 시 세계는 허무의식을 통하여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던 시에서 점차 민중적이며 현실적인 시각에서 시대와 역사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로 전개되었다.

물은 선하다. 물은 그 자체로 흐르는 모습이다. 흐르는 에너지이다. 물은 작은 샘에서 솟고, 뿌리에게 스미고, 하나의 의지로 뭉쳐 흐르고, 환희로 넘치고, 작별하듯 하늘로 증발하고, 우수가 되어 떨어져 내리고, 다시 신생의 생명으로 돌아와 이 세계를 흐른다.

우리가 태어나고 사귀고 웃고 슬프고 울고 아득히 사라질 때에도 물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계에 왔으며 우리보다 먼저 사라졌으며 우리보다 먼저 다시 태어났으니, 유한한 우리에게 물은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고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물은 불과 흙과 공기와 더불어 이 세계가 온존하는 한 온존할 것이다. 해서 물은 모든 탄생과 소멸을 완성하며, 그 자체로 소생하고 순환하는 생명이다.

이 시를 읽을 때면 ‘선한 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불이 어떤 부정과 대립이라면 물은 그마저도 끌어안는 어떤 관용. 물은 사랑. 자주 침묵하지만 한 번도 사랑을 잊은 적이 없는 마음 큰 이. 우리도 서로에게 물이 되어 서로의 목숨 속을 흐를 수 없을까. 우리는 그렇게 만날 수 없을까. 물과 같고 대지와도 같은 침묵의 큰 사랑일 수 없을까.

강은교(62) 시인이 ‘사랑法’이라는 시에서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중략)//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라고 노래했듯이.

강은교 시인은 1968년에 등단해 올해로 등단 40주년을 맞았다. 초기에 발표한 시들이 강한 허무 의식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녀를 ‘허무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녀의 시는 민중적인 서정에도 가 닿고, 사소하고 하찮은 생명들을 끌어안기도 하는 등 아주 큰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참고문헌]

– 강은교 [姜恩喬]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6]

– 시집『풀입』(민음사, 1995)

–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 박영근의 시읽기『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실천문학사, 2004)

–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4』(국립공원, 2007)

 

(편집부) 2000hans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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