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21)  귀천 (1969) 천상병

애창시(21)

 

귀천(1969) 천상병(1930 ~ 1993)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인 천상병 사진 (ch.yes24.com에서 발췌))

[천상병 시인]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거주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국어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띄어 1949년 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하기도 한다곧 한국전쟁이 터지고 전란 초기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한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이 무렵 그는 송영택김재섭 등과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고, <문예>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평론을 내놓으며 시작(詩作)과 함께 비평 활동도 겸한다천상병은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로 완료 추천을 받고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그는 이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비서로 일하는데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67년에 어이없게도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그는 죽을 때까지 다른 직업 없이 오직 시인으로 살아간다.

   1970년 겨울 어느 날부터인가 동가식서가숙하며 떠돌던 천상병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명동이나 종로에서 더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1971년 봄이 다 가도록 종적을 감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몇몇 문인들이 연고가 있는 부산에 연락을 넣어왔지만 거기에도 천상병은 없었다.

죽지 않았을까?” 가까운 시인들은 주민등록증도 없이 이 시인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천상병이 죽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안됐어시집 한 권도 없이 세상을 뜨다니!”

   시인 민영 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전갈을 넣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잡지에 흩어져 있는 작품 60여 편을 모았지만 시집 출간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그러다가 시인 성춘복이 그 시집을 내겠다고 선뜻 나섰다그래서 1971년 12월에 당시로서는 호화 장정의 천상병 시집 []가 나오는데시집 출간 소식이 신문이며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며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다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그는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행려병자로 오인되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얼마 뒤에 천상병은 백치 같은 무구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친구들 앞에 나타났다천상병은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천상병은 생전에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한다그는 시 쓰기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그는 유유자적 떠돌며 동료 문인들과 시인 지망생들에게 술값이나 밥값 명목으로 2천 원씩을 아무 거리낌 없이 뜯어낸다시인은 악의 없는 갈취범이었지만 그를 미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사람들은 그를 미워하기는커녕 희귀한 문화재처럼 아끼고 사랑했다우리는 세속적인 관행을 무시하며사회적 권위와도 무관하며사회의 풍습이나 통념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을 기인이라고 한다직업 관료나 사무직 같은 시인의 무리 속에서 천상병은 군계일학으로 돋보이는 기인이며 천부적인 시인임이 틀림없다.

  천상병이 시의 소재로 가장 많이 삼은 게 가난이다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던 그에게 가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어쩌면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졌을지 모른다오죽하면 가난은 내 직업이라고까지 노래했을까.

   여비가 없어 고향에 가지 못할 정도의 가난이라면 몹시 심한 가난일 것이다이 정도라면 궁핍이 시인의 몸과 마음을 틀림없이 옥죄었으련만 소릉조의 어디에도 그 흔적은 없다그저 가볍게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저승에도 영영 못 가는 게 아닌가.” 하고 한갓진 걱정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이미 시인은 가난에 익숙해져서 그것에 따로 불만을 갖거나 원한을 품지 않는다오히려 그것을 길들이고가난이 주는 조촐한 지복을 즐긴다그래서 가난의 고통과 힘을 동시에 체득한 시인은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하고 삶의 신비에 대해 경이감을 나타낸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 갔지만 시인에겐 가난조차 비참이나 불행원한이나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족하는 마음을 갖자조촐한 행복의 조건들이 욕심 없이 투명한 눈으로 비쳐든다이런 마음으로 사니욕심에 눈이 어두워 작은 것의 귀함과 삶의 거대함그리고 무상으로 주어지는 행복의 조건들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물질적 궁핍의 상태인 가난조차 시인의 내면에 넉넉한 낙관주의를 만들어내는 정신적인 덕성의 요소가 되었다.

​  병원에서 요양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 시인은 1972년에 친구의 손아래 누이인 목숙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1979년에는 첫 시집 []에 실린 작품들을 거의 다 옮겨 실은 시선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낸다이어 1984년에는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1987년에는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을 내놓는다.

한 도시학자가 말한 바로는서울 인사동 큰길의 총 길이는 2킬로미터를 조금 넘는다고 한다그러나 큰길의 뒤쪽으로 굽이굽이 이어지며 뻗어나간 골목길의 총 길이는 놀랍게도 큰길의 열 곱절이 넘는다그 인사동의 큰길과 굽이굽이 이어지는 골목길의 켜에는 골동품이며 옛 서화와 서책을 파는 오래된 상점과 유명·무명 화가들의 그림이 상설 전시되는 화랑많은 찻집과 음식점 등이 빼꼭하게 들어차 있다인사동 큰길에서 어느 골목 어귀로 들어서면 귀천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작은 찻집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귀천은 천상병의 널리 알려진 시편이고찻집 귀천의 주인은 시인의 아내 목순옥이다그 찻집 벽면에는 파안대소하는 천상병 시인의 커다란 얼굴 사진이 붙어 있다(2012년 1월 현재 목순옥 여사의 조카가 운영하는 2호점만 운영되고 있다).

  ‘귀천에서도 시인은 고통스러운 현존의 삶을 죽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누구보다도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이어가며누구보다도 고통스러운 삶을 견딘 시인은 놀라운 관용과 초연함으로 삶을 끌어안는다그러자 비참과 불행으로 얼룩진 삶은 아름다운 소풍이 되어버린다이 시의 어디에도 삶의 고단함이나 죽음의 쓸쓸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이런 것을 맑고 담백한 어조로 가볍게 건너뛰는 것이다.

   천상병은 한때 초기의 서정적 스타일에서 벗어나 리얼리즘 스타일의 시를 내놓기도 한다금욕주의적인 초연함과 넉넉한 관용으로 세상을 끌어안던 그는 몇몇 시에서 오랫동안 감춰온 날카로운 현실 비판 감각을 드러낸다시인은 밤 버스를 타고 있는 서민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현실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여기서 그는 불합리하고 모순투성이인 현실을 억지밖에 없는 엽전 세상으로 마음껏 비하하고그 속에서 용케도 이때껏 살았나 싶다.”라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이런 것은 앞서 펼쳐 보인 시 세계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자세다무엇 때문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현실 세계에 대한 강한 불만과 대립 의식이 사그라지지 않고 거의 날것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시인의 현실 비판 의식은 더 강화되지 않고다시 도가(道家)적인 자연의 삶가난한 일상 속에서 접하는 자연에 관심을 보이며 높은 경지의 소박성을 추구하는 시 세계로 돌아간다

.

   “비시적인 것과 시적인 것일상적 관찰과 철학적 의미초연한 관조와 정치적 관심소박한 표면과 깊은 내면을 결합하는 독특하고 뛰어난 시들을 빚어낸 천상병은 후기로 접어들며 이전보다 한결 단순하고 소박하며 고졸한 세계를 보여준다무엇보다 그의 시는 순수한 것의 원형인 어린아이의 심성을 지향하고순진성의 시학을 구현한다어린 것순진한 것약하고 착한 것을 내포한 동심에 대한 사랑과 선()지향은 천상병 시 세계의 움직일 수 없는 특징이다.

   말기에 이르면서 천상병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단순한 어조로 기독교의 신인 하느님을 예찬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기독교적 세계관이 깊이 스며든 그의 유고시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과 그 섭리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시에서 하느님은 대우주에 비견되는데그는 절대자를 향한 무궁한 외경심과 찬양 속에서도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하는 순진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1988년 만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한 시인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나 불사조처럼 살아난다이후 그는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를 펴낸다.

   1993년 4월 28병든 몸으로 누워 있던 시인은 마침내 숨을 거둔다천상병이 고단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의정부시립병원 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그가 죽고 난 뒤 몇 백만 원인가 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시인의 가족으로는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었다시인의 장모는 그걸 사람들 손이 타지 않는 곳에 감춘다고 감춘 것이 하필이면 아궁이 속이었다그걸 모르고 시인의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가난하지만 순진무구했던 시인이 죽어서도 만악의 근원인 돈을 없애버리려고 장난을 했는지도 모른다시인이 죽은 해 진짜’ 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나오고세 해 뒤인 1996년에는 [천상병 전집]이 간행된다.

[해설]

영화 박하사탕에서돌아갈 곳 없는 설경구는 철교 위에서 하늘을 향해 절규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러나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이 있는 사람이다그 이 하늘이라면 그는 천하무적으로 세상을 주유하는 사람이다하늘을 믿으니 이 땅에서는 깨끗한 빈손일 것이다하늘을 믿는데 들고 달고 품고 다닐 리 없다그러니 새벽빛에 스러지는 이슬이나저물녘 한때의 노을이나흘러가고 흘러가는 구름의 손짓 등속과 한패일밖에.

   “막걸리를 좋아하는데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라며 스스로를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시 행복’)라 일컬었던왼쪽 얼굴로는 늘 울고 있던 시인천상병!(1930~1993) ‘귀천은 1970년 발표 당시에는 주일(主日)’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그의 시는 생()의 바닥을 쳐본 사람들이 갖는 순도 높은 미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그의 언어는 힘주지 않고장식하지 않고다듬지 않는다. ‘단순성으로 하여 더 성숙한 시라 했던가이 시에서도 그는 인생이니 삶이니 사랑이니 죽음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그러니 우리도 무욕이니 초월이니 달관이니 관조니 하는 말로 설명하지 말자이슬이랑 노을이랑 구름이랑 손잡고 가는 잠깐 동안의 소풍이 아름답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그런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 가볍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그러니 소풍처럼 살다갈 뿐.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전도유망한 젊은이였으나 동백림 사건’(1967)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그 후유증은 음주벽과 영양실조로 나타났으며 급기야 행려병자로 쓰러져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그가 죽었다고 판단한 친지들에 의해 유고시집 ’(1968)가 발간되었는데그 후로도 천진난만하게 25년을 더 살다 갔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 터에새날이 와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 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이라고 노래했던 그는 분명 새가 되었을 것이다가난하고 외롭게 살다 갔으니자유롭고 가벼운 새의 영혼으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참고문헌]

– 천상병 [千祥炳] – 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시인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나무 이야기)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1(조선일보 연재, 2008)
– (『귀천』살림. 1989 : 『천상병 시집』평민사. 1996)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편집부) 2000hans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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