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23)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1948)
백석(1912 ∼ 1996)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불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게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여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내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아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약력]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 본명은 백기행(白夔行). ‘白石(백석)’과 ‘白奭(백석)’이라는 아호(雅號)가 있었으나, 작품에서는 거의 ‘白石(백석)’을 쓰고 있다.
1929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8·15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사·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함흥 소재)·여성사·왕문사(旺文社, 일본 도쿄) 등에 근무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였다. 한때 북한에 남아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전하지만, 확실치가 않다. 백석은 그 시대 어느 문학동인이나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백석은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이를 계기로 「마을의 유화(遺話)」·「닭을 채인 이야기」 등 몇 편의 산문과 번역소설 및 논문을 남기고 있으나, 실지로는 시작 활동에 주력하였다.
1936년 1월 33편의 시작품을 4부로 나누어 편성한 시집 『사슴』을 간행함으로써 문단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남북이 분단되기까지 60여 편의 시작품을 자신이 관여했던 『여성』지를 위시하여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다. 분단 이후의 북한에서의 작품활동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해설]
백석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시를 썼다. 그 마을에 전승되는 민속과 속신(俗信) 등을 소재로 그 지방의 토착어(土着語)를 구사하여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과 철학의 단면을 제시한 것이다. 어린 시절로 회귀하여 바라다보는 고향은 대개 회상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상투이지만, 백석은 그 체험조직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
백석은 자신의 어린 눈에 비쳐진 고향의 원초적인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환기되는 정서의 순화를 의도하고 있다. 또한, 마을의 민속이나 속신 같은 것을 재현시키면서도 자신의 감정이나 주관의 개입 없이 언제나 객관적인 입장에 섰다. 그 마을의 자연과 소박한 주민들의 원초적인 ‘삶’의 리얼리티를 노래하고 있을 뿐이다.
백석이 이룩한 이런 시적 성취는 우리 근대시사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백석 [白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3』(조선일보 연재, 2008)
(『사슴)』. 1956. 『백석전집)』.실천문학사.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