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25)
잘 익은 사과(2005) 김혜순(1955 ~ )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굴게 둥굴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숫시네요

(김혜순 시인)
김혜순의 시는 언어적 실험을 통해 시적 이미지의 형상을 창조하면서 여성의 존재방식과 경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여성적 글쓰기의 시적 실천을 한다는 것이다.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으며, 건국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입상하고,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 외 4편을 발표하면서 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서울예전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김혜순의 시가 지니고 있는 미덕은 언어적 실험을 통해 독특한 시적 이미지의 형상을 창조하면서 여성의 존재방식과 경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여성적 글쓰기의 시적 실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해설)
특히 세계의 부조리와 죽음의 운명에 저항하는 시적 방법으로 격렬한 언어와 이미지를 사용한다거나, 현실의 부정성을 과장해서 드러내는 시적 어조가 언어 표현의 탄력성과 경쾌함을 살려내고 있다.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것처럼, 시인은 몸을 한없이 확장시켜 세계를 몸의 보자기로 싸안거나, 몸을 샅샅이 뒤져 세계의 흔적을 발견해내는 특이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적 상상력이 아니라 자신의 몸의 경계를 허물고 싶다는 욕망과 관련된 상상력의 변주에 해당한다. 이러한 특징은 이 시인이 직설적인 시어들을 통한 이른바 육체적 상상력의 표현에 상당한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음을 말해준다.
(참고문헌)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1981),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1985), 『어느 별의 지옥』(1988),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1994), 『불쌍한 사랑 기계』(1997), 『우리들의 음화』(1997), 『달력 공장장님 보세요』(2000), 『한 잔의 붉은 거울』(2004), 『당신의 첫』(2008) 등이 있다. 산문집 『들끓는 사랑』(1996)과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2002)을 냈다. 1992년 소월시문학상, 1996년에 「불쌍한 사랑기계」로 김수영문학상을 받았다. 2000년 제1회 월간 현대시 작품상,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2008년 제16회 대산문학상을 각각 수상했다.
김혜순 [金惠順]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5』(조선일보 연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