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27) 광야(1939) 이육사(1904 ~ 1944)  

애창시(27)

 

광야(1939)   이육사(1904 ~ 1944)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인 이육사 사진 (Naver.image에서 발췌)

 

(해설)

   시집 한 권으로 현대시 100에 길이 남은 시인들이 많다김소월과 한용운과 김영랑이 그렇다특히 유고시집 한 권으로 길이 남은 시인들도 있으니이상과 윤동주와 기형도 그리고 여기 이육사(1904~1944) 시인이 그렇다그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이 따라 다닌다지사(志士), 독립투사혁명가아나키스트테러리스트의열단 단원 등. 1928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수감되었을 때 수인번호가 264(혹은 64), 이를 대륙의 역사라는 뜻의 한자 육사(陸史)’로 바꾸었다고 한다그가 어떤 항일운동을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단지 17회 정도 감옥을 들락거리며 심한 고문을 받았다는 것만주·북경 등지를 부단히 왕래했다는 것북경 감옥에서 40세의 나이로 옥사했다는 것 정도.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것인지 안 들렸다는 것인지초인이 있을 거라는 것인지 초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지이 광야에 목놓아 부르는 사람이 초인인지 나인지초인을 목놓아 부르는 것인지 노래를 목놓아 부르는 것인지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왜 천고(千古)의 뒤에야 오는 것인지 해석 이 애매한 부분이 많은데도 이 시가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늘이 처음 열렸던 날부터 다시 천고 후까지휘달리던 산맥들도 범하지 못했으며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어준 이곳이 신성불가침의 시공간 속에서 흰 눈과 흰 말(), 매화 향기와 초인의 이미지는 돌올하다특히 까마득한 날부터 천고 뒤로 이어지는 대서사적 시제와 감탄하고 묻고 명령하는 극적인 어조 속에서 광야의 고결한 미감과 강렬한 정서는 한결 고무된다웅대하다는 말장엄하다는 말이 이만큼 어울리는 시도 드물 것이다.

감옥에서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유시 에서도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노라라고 노래했다오천 년의 역사가 시작된 이 광야에서지금여기의 눈보라 치는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찬란한 꽃을 피울 미래의 그날을 떠올려본다시인이 기꺼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던 이유일 것이다기름을 바른 단정한 머리에 늘 조용조용 말하고 행동했다는올곧은 시인이 올곧은 삶 속에서 일구어낸 참 올곧은 시다.

(작가 소개)

   본명은 원록(源綠).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 출생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그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다시 북경으로 가서 북경사관학교에 입학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이 때 그의 수인(囚人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1929년에 출옥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그곳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정의부(正義府)‧군정부(軍政府)‧의열단(義烈團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으며노신(魯迅)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3년 9월 귀국하여 이 때부터 시작(詩作)에 전념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그의 첫 작품은 1935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조광사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논문평론번역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어 재능을 나타냈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春秋三題)」와 시 「실제(失題)」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교목」「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 발표는 주로 『조광』『풍림』『문장』『인문평론』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시작활동 못지 않게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1941년 폐병을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6년 『육사시집』이 발간되었다.

학력사항

보문의숙(진성이씨 문중 신식학교). 대구 교남학교. 중국 북경사관학교(중퇴). 중국 북경대학교 – 사회학

경력사항

독립운동단체 의열단 활동, 1934년 신조선사 근무, 중외일보 근무, 조광사 근무, 인문사 근무

작품목록

청포도, 절정, 광야, 육사시집, 꽃, 이육사의 시와 산문 그리고 인생, 교목, 노정기, 황혼

 (참고문헌)

이육사 [李陸史]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27(조선일보 연재, 2008)
(『문장』. 1939. 8: 『육사 시집』열린책들. 2004)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편집부) 2000hans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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