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과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시인 허수경 사진 (google image에서 발췌)
(작가 허수경)
경상남도 진주 출신으로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독일 뮌스트대학교대학원 고대근동고고학 박사 이수, 1987년 실천문학에 <땡볕>을 발표하면서 작춤활동 시작. 2001년 제14회 동서문학상, 2016년 제6회 전숙희문학상 수상
(작품)
[시]
「땡볕」 외, 『실천문학』, 1987.6, 시.
「원폭수첩 2」 외, 『세계의문학』, 1987.9, 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88, 시집.
「지리산 감나무」 외, 『실천문학』, 1988.4, 시.
「이 마을에도 눈이 익고」, 『월간중앙』, 1989.2, 시.
「망초꽃 사랑」 외, 『문학과 비평』, 1989.3, 시.
「자장노래 1」 외, 『창작과비평』, 1989.3, 시.
「여의도 엘레지 1-개그맨」 외, 『문학과사회』, 1989.9, 시.
「저자에서」, 『창작과비평』, 1989.9, 시.
「가을별초」 외, 『문학정신』, 1989.10, 시.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질꺼야』, 문학세계사, 1990,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창작과비평사, 2001, 시집.
「빈 얼굴을 지닌 노인들만」 외 2편, 『문학과사회』, 2004.여름, 시.
「그래, 그래, 그 잎이」 외 4편, 『한국문학』, 2004.가을, 시.
「물 좀 가져다주어요」 외 2편, 『문학동네』, 2004.겨울, 시.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 시집.
‘그대’는 어떻게 ‘당신’이 되는가. 허수경(44) 시인은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라고 한다. ‘사내’가 아름다울 때, 그 아름다움에 기댈 수 있을 때 ‘당신’이 되기도 한다. 부빈다는 것, 기댄다는 것, 그것은 다정(多情)이고 병(病)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병자처럼 당신을 묻은 마음의 무덤에 벌초하러 간다. 사실은 슬픔으로 이어진 ‘살아옴의 상처’와,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한 병의 맨 술을 마시는 중이리라. 백수광부처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훌쩍 건너가 버린 당신! 당신이 먼저 당도해버린 그곳은 나 또한 혼자서 가야 할 먼 집이다. 그러니 남겨진 나는 참혹할밖에.
참혹은 ‘당신’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총체적 참혹이다. 사랑을 떠나 보낸 실연의 참혹, 아버지를 여읜 망부의 참혹, 신념을 잃은 한 시대의 참혹.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고 무를 수도 없는, 죄다 마음에 묻어야 하는 당신들이다. 그런 당신을 웃으면서 울면서 혹은 취해서 부르는 이 시의 언어는 언어 이전이거나 언어 이후다. 단속적인 말줄임표와 쉼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킥킥’이라는 의성어에는, 참혹인 줄 알면서도 참혹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자의 내면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나와 당신, 사랑의 마음과 마음의 무덤, 환후와 치병이 ‘각각 따로’이기에, 당신과 함께했던 세월과 사랑과 상처와 그 상처의 몸이 모두 적요이고 울음이다. 그런 울음을 짊어지고 가는 시인, 세간의 혼몽을 잘 먹고 잘 노래하는 시인이야말로 자신의 불우함을 다해 노래하는 시인의 지복(至福)일 터, 이 시는 그 지복의 한 자락을 걸쳐 입고 있다.
허수경 시인은 울음 같은, 비명 같은, 취생몽사 같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직후 독일로 휘리릭 날아가버렸다. 1990년대 초반이었고, 시인의 생부가 돌아가시고 난 직후였다. 동안(童顔)에, 대책 없는 맨몸이었다. 고고학을 공부한다 했다. 잘살고 있다고 했다. 독일로 날아간 지 벌써 16년째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은 언제 불러도 참 좋다, 그리고 참 참혹하다, 킥킥 당신….
(참조문헌)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1』(조선일보 연재, 2008) –일간『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46』(조선일보 연재, 2008)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