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들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
그걸 만들 손과 더불어.
시인 정현종 사진 (google image에서 발췌)
(작가 정현종)
정현종은 1939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관청 병참계 판임관이라는 공직에 있었다. 그는 천주교를 믿는 부모들에 의해 갓난아기 때 부근의 약현성당에서 영세를 받는다. 아버지의 근무지가 바뀜에 따라 그가 세 살 나던 해에 그의 가족은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화전으로 이사한다. 그는 1946년 덕은국민학교에 입학하고, 5학년 때 한국전쟁을 겪는다. 그는 전란 때 모래밭에서 죽은 사람의 뼈를 치켜들거나 막대기에 해골을 꿰어 든 채 마을 아이들과 함께 벌거벗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놀던 기억이 있다.
1953년 기독교 재단에서 설립한 대광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는 화전에서 서울로 기차 통학을 한다. 이 무렵부터 그는 책읽기에 깊이 빠져드는데, 김내성의 『마인(魔人)』이나 방인근의 『벌레 먹은 장미』 같은 대중소설부터 학생 잡지 《학원》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읽어 치운다. 왕성한 책읽기를 통해 그는 답답하게 닫혀 있는 듯한 현실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몽상의 천국’을 맛본다. 그는 사춘기에 그 나이 때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육체의 욕망과 그것을 억압하는 종교적 계율 사이에서 강박 관념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런 강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즈음 그는 서양 고전 무용을 소재로 한 「로얄 발레」라는 영화를 중앙극장에서 관람한 뒤 전율과 함께 육체의 정화를 체험한다. 그는 영화 속의 춤을 통해 “비로소 육체의 아름다움에 눈떴고 육체의 빛”을 보며 “육체에 대한 경멸로부터 일시에 벗어”나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칙칙한 성적 억압을 떨쳐낸다.
발레와 만나며 욕망과 금기 사이에서 싹튼 강박 관념을 털어버린 그는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사상계》를 애독하고 함석헌의 글들을 읽으며 감동하기도 한다. 1959년 진로 선택에 따르는 고뇌 없이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간다. 이듬해인 1960년 6월 그는 1년 6개월 동안 복무하는 학보병으로 자원입대한다. 근무지는 경기도 양평이었는데, 그는 행정병 비슷한 보직을 맡아 비교적 편하게 군대 생활을 한다. 1962년 군에서 제대한 뒤 복학한 그는 《연세춘추》의 기자들과 어울리며 학교 신문에 시와 산문을 발표하고, 실존주의 사상가들과 보들레르, 도스토옙스키 등의 책을 읽으며 지낸다. 《연세춘추》에 실린 시들이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있던 박두진의 눈에 띄어, 정현종은 대학 4학년 때인 1964년 5월에 《현대문학》의 1회 추천을 받는다. 이때 추천받은 작품이 「화음(和音)」과 「주검에게」다. 우아한 곡선을 그으며 하늘로 솟구치는 춤의 아름다운 동작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초기 시에는 시인이 청소년기에 몰입한 고전 발레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정현종은 이렇게 처음부터 한국 시의 주류로 대접받던 서정주, 박재삼의 토속적 미학의 세계나 허무주의, 그리고 1960년대에 한국 시의 큰 흐름을 이룬 채 사물의 외관을 통해 내면 탐구의 이미지를 추구하던 시인들과 다른 자기의 길을 개척한다. “연애와 무모(無謀), 알코올과 시의 속도, 어리석음과 시간의 속도”에 취해 고통스러운 현실을 뛰어넘을 길을 탐색하던 시인은 유추에 의해 서로 암시하고 환기하는 이미지를 중첩하며 서구적 조사법(措辭法)으로 그것을 독특하게 이끌어낸다.
1965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신태양사>에 정식으로 들어간다. 정현종은 같은 해 《현대문학》 3월호에 「독무(獨舞)」라는 시로 완료 추천을 받아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66년 정현종은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에 참여한다. 《사계》는 5집까지 나온 뒤 《68문학》으로 바뀌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된다. 1970년 그는 <신태양사>에서 나와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자리를 옮긴다. 드디어 1972년에 들어, 선배와 동료 문인들이 제작비를 부담해 펴낸 그의 첫 시집 『사물의 꿈』이 <민음사>에서 나온다.
1974년 정현종은 미국 아이오와대학교와 국무부가 함께 주관하는 국제 창작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이때 그의 시 15편을 고려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있던 김우창이 영역해주는데, 이 인연은 1974년 <민음사>에서 출간된 『고통의 축제』에 붙인 김우창의 뛰어난 해설로 이어진다. <서울신문>에서 나와 1975년 <중앙일보> 월간부 기자로 자리를 옮긴 그는 1977년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임용된다. 그는 1982년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갈 때까지 이 학교에서 재직하며 예비 작가와 시인들을 길러낸다.
정현종은 『사물의 꿈』과 『고통의 축제』 이후 『나는 별 아저씨』(1978),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같은 시집을 펴내며 중견 시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다. 그의 시 세계가 변화의 낌새를 보인 것은 1980년 광주항쟁의 전개 양상과 관련이 깊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시인은 고통의 현실을 뛰어넘어 초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상상력의 샘이 마를 줄 몰라, 『한 꽃송이』(1992), 『세상의 나무들』(1995), 『갈증이며 샘물인』(1999) 같은 시집을 잇달아 내놓는다.
정현종은 뛰어난 시인일 뿐 아니라 자기 이론을 확고하게 정립한 시론가이며, 빼어난 시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는 시론가로서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1975), 『숨과 꿈』(1982), 『관심과 시각』(1983), 『생명의 황홀』(1989)같은 책을 내며, 시 번역가로서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와 로르카의 시집 『강의 백일몽』 등을 옮겨 펴낸다.
(해설)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행위를 하게 됩니다. 그 중 일부는 공허함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핍에서 왔기에 어떤 행위를 해도 영원히 채울 수 없는 결핍으로 귀속하게 되어있습니다. 결핍의 다른 이름은 바로 ‘적막’입니다. 모든 존재의 맨얼굴은 영원한 적막이라는 것, 그리하여 그 적막 속으로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