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36) 우리 오빠와 화로(1929), 임화(1908~1953)  

애창시(36)

 

우리 오빠와 화로 <1929>      임화 (1908년 ~ 1953)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 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南)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 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永男)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 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永男)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그래서 저도 영남(永男)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에 일 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永男)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封筒꽁무니를 뭅니다
지금―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永男)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 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 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永男)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永男)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슬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永男)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누이동생                             

 

시인 임 화 사진 (google image에서 발췌)

 

(작가 임화)

시인·평론가·문학운동가.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서울 출생문필 활동을 시작하였던 1926년에는 성아(星兒)라는 필명을, 1928년부터는 임화·김철우(金鐵友쌍수대인(雙樹臺人청로(靑爐등의 필명을 썼다.

1921년 보성중학에 입학하였다가 1925년에 중퇴하였고, 1926년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연극에도 뛰어들었다.

  시 「지구와 빡테리아」·「담()1927」 등이 잘 일러주고 있는 것처럼 이 무렵 그는 다다이즘(dadaism)과 프롤레타리아사상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으며바로 이러한 전위사조에 대한 모방욕이 무산계급문학운동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낳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담-1927」은 서양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의 죽음에 대한 추모의 정과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증오심을 표현한 것으로 프로시와 이야기시의 유형에 넣을 수 있다.

 

 1928년에 박영희(朴英熙)와 만났으며윤기정(尹基鼎)과 가까이 하면서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담하였다.

  1929년에는 「우리 옵바와 화로」·「네거리의 순이(順伊)·「어머니」·「병감(病監)에서 죽은 녀석」·「우산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등의 시를 써냄으로써 일약 대표적인 프로 시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 작품들은 프롤레타리아사상으로 요약되는 주제와 이야기시 또는 단형서사시라는 형식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1930년 일본으로 가서 이북만(李北滿중심의 무산자그룹에서 활동하였고이듬해 귀국하여 1932년에 카프 서기장이 되면서 카프 제2세대의 주역이 되었다.

 카프 전주사건이 터진 그 이듬해인 1935년에 카프 해산계를 낸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의 임화의 삶은 폐결핵으로 고생 하였으며시집 『현해탄(玄海灘)·『조선신문학사』 간행출판사 학예사’ 운영일제 신체제문화운동에 대한 협조 등으로 점철되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문학건설본부의 간판을 내걸고 많은 문인들을 규합하였다. 1946년 2월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주최의 제1차 전국문학자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1947년 11월에 월북하기 전까지는 박헌영(朴憲永이강국(李康國노선의 민전의 기획차장으로 활동하였으며월북 후에는 6·25까지 조·소문화협회 중앙위 부위원장으로 일하였다. 6·25 때는 다시 서울에 왔다가 그 뒤 낙동강 전선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휴전 직후 1953년 8월에 남로당 중심 인물들과 함께 북한정권의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미제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하였다당시 그의 옆에는 이원조(李源朝설정식(薛貞植등의 문인들이 있었다.

  19세부터 시·평론을 발표하였던 임화가 남긴 시집으로는 『현해탄』(1938)·『찬가(讚歌)(1947)·『회상시집(回想詩集)(1947)·『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 등이 있고평론집으로는 『문학의 논리』(1940)가 있으며편저로는 『현대조선시인선집』(1939)이 있다비록 미완으로 그쳤지만 조선신문학사 서술 작업도 꾀한 바 있다.

생전에 80편에 가까운 시와 200편이 넘는 평론을 쓴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며한국 현대시사와 비평사 그리고 현대문학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특히, 19201930년대의 프로문학과 해방 직후의 좌익문학을 논할 때 필수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존재이다그는 문학운동사·한국 현대문학사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인물이 된다.

 

(해설)

  작품 속의 ‘누이 동생’은 질화로와 화젓가락이라는 시적 매개를 통해 당대의 열악한 노동현실과 그에 대한 극복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직접적인 노동쟁의를 묘사하는 대신 노동운동에 뛰어든 청년과 그 가족이 겪은 생활 현실의 단면을 누이동생이라는 여성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편지체 형식으로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편지의 초반부에서는 영남()이가 힘든 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사온 거북 무늬 화로가 깨어진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현재 삼남매가 처해 있는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중반부에서는 예전에 오빠가 보여 준 행동과 말들을 통해 현재 자신과 영남이가 처해 있는 상황의 의미를 되새기고 오빠와 오빠의 친구들이 꿋꿋하게 사회의 변혁을 위해 나아가는 모습에 대한 공감과 격려의 메시지를 전한다. 마지막에는 그러한 사회적 변혁의 운동 속에서 자신과 영남이의 처지와 동일한 상황에 있는 다른 이들에 대한 시선을 확인하고 사회적 운동에 대한 동참 의식을 나타낸다.

  이 시에서 표면에 드러나 있는 사건은 ‘화로의 깨어짐’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시의 담론을 이끌어가는 것은 사건의 전개라기보다는 각 인물들의 ‘발화들’이다. 이 시는 일차적으로 기존 프로시의 일방적인 담론 구조를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시에 서간체라는 장치를 도입하여 새로운 창작방법을 실천한 결과 얻어진 성과이다. 새로운 담론 구조 속에서 타자는 더 이상 시인과 텍스트의 외부에 소외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독자는 시 속의 돈호법에 의해 계속해서 텍스트 안으로 불려가며 자신의 내적 경험과 내면을 환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시인이 구현한 담론의 장치에 의해 자신의 음성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구조는 투쟁을 호소하고 계속 싸워나갈 것을 다짐하는 내용을 은근하면서도 적절한 어조로 직접 이야기하듯 담아내어 강한 선동성을 지니게 한다. 이를 통해 이 시가 쓰인 1929년 무렵에 이미 임화의 세계관이 확고하게 노동자 계급의 세계관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작가인 임화 자신은 이 작품을 발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작품의 내용이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속으로 직접 들어가지 못한 채, 관념적으로만 다가선 결과임을 스스로 비판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36(조선일보 연재, 2008)
(『현해탄』.동광당 서점. 1938 :『임화전집』풀빛. 198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편집부) 2000hans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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