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시인 이용악 사진(google image에서 발췌)
(작가 이용악)
시인. 함경북도 경성 출생.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6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에서 수학했다. 1935년 3월 「패배자의 소원」을 처음으로 『신인문학』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같은 해 「애소유언(哀訴遺言)」, 「너는 왜 울고 있느냐」, 「임금원의 오후」, 「북국의 가을」 등을 발표하는 등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했으며, 《인문평론(人文評論)》지의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1937년 첫번째 시집 『분수령』을 발간하였고, 이듬해 두번째 시집 『낡은 집』을 도쿄에서 간행하였다.
그는 초기 소년시절의 가혹한 체험, 고학, 노동, 끊임없는 가난, 고달픈 생활인으로서의 고통 등 자서전적 체험을 뛰어난 서정시로 읊었다. 이러한 개인적 체험을 일제하 유이민의 참담한 삶과 궁핍한 현실로 확대시킨 점에 이용악의 특징이 있다. 1946년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시 분과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중앙신문』 기자로 생활하였다. 이 시기에 시집 『오랑캐꽃』을 발간하였다.
1949년 8월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가 1950년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진격해 오면서 출옥하였다. 시 「노한 눈들」, 「짓밟히는 거리에서」, 「빗발 속에서」 등은 이 시기에 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시들에는 미국에 대한 증오와 반미투쟁에 앞장선 남한 민중들의 활동을 그려놓고 있다. 1951년부터 1952년 7월까지 조선문학동맹 시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56년 11월부터 조선작가동맹출판사 단행본 편집부 부주필로 일하였다. 시 「원쑤의 가슴팍에 땅크를 굴리자」는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창작한 그의 대표작이다. 전후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평남관개공사를 독특한 필치로 노래한 「평남관개시초」를 들 수 있다.
1957년에 출판된 『리용악 시선집』에는 해방 전부터 이 시기까지에 창작된 그의 우수한 시 작품들이 편집되어 있다. 그의 시 창작의 특징은 공장과 농촌, 어촌 등으로 시적 공간을 넓힌 것이며 근로하는 인민들의 생활에 대한 기쁨이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윽한 향토적 서정을 풍기고 있는 점이다. 이밖에도 시 「석탄」, 「어선 민청호」, 「위대한 사랑」, 「격류한다 사회주의에로」, 「기발은 하나」, 「꼰스딴짜의 새벽」 등을 발표하였다. 1968년에 「날강도 미제가 무릎을 끓었다」를 발표한 이후로 더 이상 시작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63년에는 김상훈과 함께 『역대 악부시가』를 번역 발간하기도 했다. 1971년 2월 15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작품목록)
분수령, 북쪽, 낡은 집, 그리움, 오랑캐꽃, 기관구에서, 달 있는 제사, 전라도 가시내, 하늘만 곱구나, 이용악 시 전집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쪽은 고향, 리용악 시선집
(해설)
이용악의 시는 주로 강한 의지력, 침통한 정조,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사상성을 겸비한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북간도 어느 술막에서 함경도 사내와 전라도 가시내가 만났다. 사내는 언 발로 눈보라를 뚫고 두만강을 건너왔으며 날이 밝으면 다시 흔적도 없이 떠나야 한다. 가시내는 석 달 전에 북으로 달리는 ‘불술기(기차)’ 속에서 치마를 뒤집어쓴 채 이틀을 울며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팔려왔다. 그런 두 남녀가 국경 너머에서 만나 겨울밤 내 지나온 내력을 이야기하며 술잔을 주고받고 있다.
그 밤 내 사내가 ‘가시내야‘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것도 함경도 사내가 ‘전라도 가시내야‘라고 부를 때, 그 전라도 가시내는 한없이 차고 한없이 차진 느낌이다. 고향을 떠나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고 울었던 가시내, 지금은 남실남실 술을 치는 가시내. 때로 싸늘한 웃음을 보조개를 소리 없이 새기는 가시내, 까무스레한 얼굴에 눈이 바다처럼 푸른 가시내, 간간이 전라도 사투리가 섞이는 가시내…. 이 함경도 사내처럼 나는, 그 전라도 가시내를 만난 것만 같다. 전라도 개펄의 바지락 조개 같고 세발낙지 같고 때로 꿈꿈한 홍어 같기도 했으리라.
그 밤 내내 함경도 사내가 피워 올리는 북쪽 눈포래 냄새와, 전라도 가시내가 피워 올리는 남쪽 바다 냄새에 북간도 술막이 흥성했겠다. 그 술막의 술독 바닥났겠다. 눈에 선한, ‘흉참한‘ 시대를 살았던 그 전라도 가시내. “너의 노래가 어부의 자장가처럼 애조롭다/너는 어느 흉작촌(凶作村)이 보낸 어린 희생자냐“(제비 같은 소녀야–강 건너 주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