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4)  즐거운 편지<1958> 황동규(1938~)

애창시(4)

 

즐거운 편지<1958>  황동규(1938~ )

 

1.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황동규 시인]

1938년 4월 9일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으로 추천받아 문단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1961), 『비가』(196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0)등이 있으며, 『사랑의 뿌리』(1976), 『겨울의 노래』(1979), 『나의 시의 빛과 그늘』(1994),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2001), 『삶의 향기 몇점』(2008) 등의 산문집이 있다.

1998년 『황동규 시 전집』이 간행되었다. 그의 시 세계는 초기 서정시편에서 출발하여 「비가」 연작시를 거치면서 심화되고, 1970년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겨울의 빛」을 거치며 극서정시로 나아가고, 여기서 다시 선시풍의 연작시 「풍장」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시인 「시월」이나 「즐거운 편지」 등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담긴 적막하고 쓸쓸한 내면풍경을 담은 시이면서 시인의 남다른 개성이 엿보이는 시이다. 그는 「비가」를 통해 우울한 내면세계의 묘사에서 현실의 고뇌를 껴안으려는 정열을 드러낸다. 「비가」는 방황하는 자, 혹은 내몰린 자의 언어를 통해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으로, 시인이 구체적인 현실세계로 진입하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이후 그의 시에는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으며, 꿈과 이상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부정이 시적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스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시적 주제로 삼는다.

「태평가」를 비롯해 「삼남에 내리는 눈」, 「열하일기」는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감정을 통어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반어적 울림으로 드러난 경우이다. 시적 대상에 대한 거리 유지는 그가 현실에 함몰되지 않도록 하는 방어기제이자 시적 긴장을 유지시키는 근원적 힘이라고 여겨진다. 일그러졌거나 위악적인 자아의 모습은 사회구조에 대한 시적 거부의 의미를 지니며, 파편화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시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읽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의 전편을 휘감고 있다면 「겨울의 빛」은 그의 시가 합치되고 또한 분기되는 갈림길이다. 초기 시의 눈과 겨울의 이미지들이 시인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겨울의 빛」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풍장 연작시에서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감싸안으며 허무주의를 초극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반추로써 삶의 무게를 덜고, 나아가 죽음조차 길들이겠다는 의지의 자유분방한 표현이 「풍장」 연작인 것이다. 황동규의 시적 어법은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에 이르러 더욱 유연함을 얻는데, 이 시가 드러내는 일상적이고 자유분방한 시적 짜임새는 주체적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담고 있다.

그 존재의 발견은 크고 위대한 것들에게서가 아니라 한없이 작고 가벼운 것에서 얻어진다. 가볍다는 것에서 자유로움을 얻고, 그 자유로움으로써 속박을 벗어나는 시적 깨달음은 초기 시의 현실과 자아 사이의 내적 갈등을 담은 비극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거쳐 다져진 원숙함이다.

[해설]

황동규 시인은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는다. 반 세기 동안이나 그는 우리말을 정갈하게 빚었고 우리말의 숨결을 세세하게 보살펴 고아(高雅)하게 했다. 놀랍게도 ‘즐거운 편지’는 황동규 시인이 1958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그의 데뷔작이다.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과 ‘편지’ 등에서 낭송되어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이 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의 원 제목도 ‘즐거운 편지’였다고 한다. 이제 이 시는 한국인의 애송시가 되었다. 만남과 이별의 회전 속도가 이처럼 빠른 시대에 이 시는 왜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가. 왜 여전히 막막하게 하는가. 헤어져 돌아가던 옛사랑의 뒷모습을 보게 하는가.

하늘이 먹먹하게 어두워지고 주먹눈이 막 내리는 날이면 어디 먼 산골이나 바닷가 민박집에라도 가고 싶어진다. 작은 넝쿨에 말라붙는 붉은 열매 같은 눈빛을 하고서 눈이 내리는 그 시간을 살고 싶어진다. 눈이 그치면 순백의 설원과 설원 위를 유행(遊行)하는 바람의 노래를 듣고 싶어진다. 그리고 멀리 두고 온 사람을 ‘가까스로’ 떠올릴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적막한 시간에 나를 선택하지 않은 사랑을 떠올리는 일은 아주 사소한 일이 될 것이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 될 것이다. 너무 사소하여서 손을 놓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다. 너무 사소하여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렇게 이 세상에서 잊혀진 듯 살 것이다. 폭설에 갇힌 순한 산짐승처럼 우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이별의 말은 나의 가슴에서 깨끗하게 씻어낼 것이다.

겨울 하늘에 뜬 달이 천강(千江)을 비추어도 그대는 나를 생각하지 말라. 그대가 나의 사랑을 다시 받아 안는 날이 와도 내가 아직 저 산골짜기 깊은 산막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하는 그런 아주 짧은 후일에도 그대는 나를 생각하지 말라

[참고문헌]

– 황동규 [黃東奎]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4』(조선일보 연재, 2008)

–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

– 일간『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50/10』(조선일보 연재, 2008)

– 『어떤 개인 날』. 창우사. 1961 :『황동규 시전집』. 문학과지성사. 1998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편집부) 2000hans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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