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47)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년> 이상화(1901~1943)

애창시(47)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년>         이상화(1901 ~ 1943)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조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을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보고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닿은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어디로 가느냐웃어웁다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시인 이상희 사진 (google image에서 발췌)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무량(無量상화(尙火想華백아(白啞). 경상북도 대구 출신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며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친구 백기만(白基萬)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백기만·이상백(李相佰)과 『거화(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 활동(詩作活動)을 시작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김기진(金基鎭등과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그 해 8월에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되었다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문단 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欷嘆)(1922)·「단조(單調)(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이중(二重)의 사망」(1923)·「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

  특히「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 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다.

  또한 복합적인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도전이 있으며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이 등장한다이 계열의 작품으로 「몽환병(夢幻病)(개벽, 1925)·「비음(緋音)(개벽, 1925)·「이별(離別)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경향파적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로는 「가상」·「구루마꾼」·「엿장사」·「거러지」(이상은 개벽, 1925)가 있다한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는 사회참여적인 색조을 띤 원숙한 작품이다「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인 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으로 주목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嘲笑)(개벽, 1925)·「통곡(慟哭)(개벽, 1926)·「도쿄에서」(문예운동, 1926)·「파란비」「신여성, 1926·「선구자(先驅者)의 노래」(개벽, 1925)·「조선병(朝鮮病)(개벽, 1926)·「비갠 아침」(개벽, 1926)·「저므는 놀안에서」(조선문예, 1928)가 있다.

  그의 후기 작품 경향은 철저한 회의와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천(逆天)(시원, 1935)·「서러운 해조」(문장, 1941) 등이 있다발굴된 작품으로는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다.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李光洙)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백조파’ 동인의 한 사람이다.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쓰고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화의 시비는 1946년 동향인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해설)

오등(吾等)은 자()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하는 기미(己未독립선언문에는 시 못지않은 리듬과 비장한 여운이 있다고교 시절이 선언문과 함께 짝패처럼 좔좔좔 암송해야 했던 시가 이상화(1901~1943)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3월 8일 장날을 기해 대구에서 학생만세운동을 모의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그는 상화(相和)라는 이름을 상화(尙火)나 상화(想華)로 쓰곤 했는데정녕 그의 시와 삶이 항상 불‘ 같았으며 만주를 오가며 늘 독립운동을 생각하곤 했다그러니 3월이 되면 이 시가 떠오를 수밖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신령이고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들의 봄과 인간의 봄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그리고 시인은 지금은에 담긴 이 봄의 혼곤 속을 다리를 절며 걷고 있다.

이 시의 매력은 굳세고 비장한 의지와 어우러진 섬세한 감각에 있다가르마 같은 논길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삼단 같은 머리를 감은 보리밭살진 젖가슴 같은 흙 등 빼앗긴 들을 온통 사랑스런 여성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그러니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 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관능적인 연애시의 옷을 입은 지극한 애국애족의 저항시다.

(참고문헌)

이상화 [李相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47(조선일보 연재, 2008)

(편집부) 2000hans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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