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50)   봄(1974) 이성부(1942~2012)

애창시(50)

 

(1974)       이성부(1942~2012)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미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누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민중시인 이성부 사진
(민중시인 이성부 사진) (OO 신문에서 캡쳐)

 

(시인 이성부)

시인 이성부(李盛夫, 1942~ )는 1942년 1월 22일에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54년, 광주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학생잡지 《학원》에 여러 차례 시를 발표한다. 광주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고교 선배인 박성룡, 윤삼하, 정현웅, 강태열 등을 만나며 문학적 분위기 속에서 습작을 계속한다.

전국 규모의 고교생문예작품현상모집에 여러 차례 당선하며 시적 재능을 드러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6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바람」이 당선된다. 이어 1960년에 조병화, 황순원, 김광섭 등이 교수로 있는 경희대학교 국문과에 진학해 본격적인 습작기를 갖는다. 이듬해에 《현대문학》에 「소모(消耗)의 밤」이 초회 추천을 받고 이어 「백주」, 「열차」 등으로 추천을 완료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그리고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우리들의 양식(糧食)」이 당선된다.

1968년에 《68문학》 동인으로 참여하고 「전라도」 연작을 발표하면서 1970년대부터 활발하게 일어나는 민중시의 흐름을 계시하며 민중 지향적 서정시의 기반을 닦는다. 1969년, <한국일보사> 기자로 입사한 뒤 바로 첫 시집 『이성부시집』을 <시인사>에서 펴내는데, 이것으로 제15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한다. 1974년 두 번째 시집 『우리들의 양식』을 <민음사>에서 간행하고, 그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참여, 문학인 101인 선언에 서명한다.

1977년에 고통스러운 삶과 역사의 어둠을 이겨내고 일어서고자 하는 극복과 인고의 정신을 노래한 제3시집 『백제행』을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하고 이것으로 제4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한다. 광주 항쟁을 겪은 후인 1981년에 제4시집 『전야(前夜)』를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하고 이후 여러 해 동안 시를 발표하지 않는다. 1989년에 제5시집 『빈 산 뒤에 두고』를 풀빛사에서 출간하는데 오랜만에 발표한 이 시집에서 시인은 비극의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한 죄의식 탓인지 시에 대한 회의, 꺾인 희망과 의지 등을 드러낸다.

아직은 아무도 민중을 말하지 않을 때, 이성부는 노동의 삶에 깃든 당당함을 노래한다. 이 시는 톱날, 베니어, 집, 자갈, 철근 등이 암시하듯이 어둠에 묻혀가는 건축 공사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활달한 어조로 전개되는 이 시 전체를 감싸는 분위기는 밝고 희망적이기보다는 어둡고 암담하며 좌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거친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에 대한 소묘, 그리고 그 고된 노동을 감당하는 남성적 힘에 대한 찬탄과 신뢰가 뒤섞여 있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여느 노동자들과 다르다. 그는 “구멍난 내 바지 가랑이의 시대를 / 그러나 나는 읽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노동자들은 거친 노동과 음주, 가난을 강요하는 현실에 무자각적으로 길들여지지만, ‘나’는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으며 동시에 “구리빛 건강의 힘을 쌓아둔다”. 모순과 불평 등을 만들어내는 현실에 대한 통찰력과 함께 그 인식을 현실 속에 구체적으로 행동화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1960년대의 주류적 흐름이 인간의 내면성에 대한 탐구였지만, 그 흐름과 비켜서서 이성부의 초기 시들은 현실과 사물에 대한 사실주의적 관찰을 바탕으로 얻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의 시는 민중문학의 도식적 구호주의나 소재주의에로 함몰하지 않는다. 그는 시대의 어둠을 직시하지만, 동시에 민중의 내면에 있는 분노와 희망을 노래한다.

시인의 현실인식은 어둠에 물들어 있다. 그의 기본 정조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의해 짓눌리고 패배하고, 그 오랜 소외와 억압 속에서 일상화된 불행을 수납한 자들의 내면화된 슬픔과 한의 정조이다. 시인의 시구를 빌린다면 그들은 “이미 너무나 강력한 패배에 길들고 말았다.”(「자연」) 하지만 그들은 그냥 쓰러져 죽지는 않는다.

이성부의 시들은 패배와 불행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승리, 낙관적 기대를 함께 새겨놓는다. 불빛은 죽지만, 그 죽음으로써 “보다 가까운 아침”을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를 가능케 하는 것이 “걷어붙인 팔뚝과 힘”이고, 또 그것을 작동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김종철은 사랑이 이성부 시의 기본적인 주제이며, 더 나아가 “사랑은 삶을 가능케 하는 원천적인 힘이다. 뿐만 아니라 사랑이 그의 낙관주의와 관련하여 특별한 중요성이 있는 것은 그것이 어떤 압력이나 가난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라지지 않는 믿음 때문이다.”라고 말한다.1)

전라도·백제·광주·무등산은 시인 태생의 기억을 안고 있는 고향이며, 동시에 시의 상상력의 원천이다. 그의 상상세계의 넓은 들에는 영산강이 흐르고, 그 중심에는 무등산이 우뚝 솟아 있다. ‘전라도’ 연작시편들은 시작/끝, 어둠/빛, 죽음/생명, 불/고요, 피/가난, 기대/무너짐, 용기/패배 등의 중층적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전라도’에 겹쳐지는 어둠·흉터·끝남·죽음·피·가난 등의 이미지들은 이곳이 수난과 수탈의 땅의 상징이며, 고통스러운 실존적 현존의 자리임을 말해준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꺾일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로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던 이 낙관주의적 시인이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돌연 깊은 회의와 패배주의에 사로잡힌다. 그의 회의와 패배주의 이면에는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원죄의식이 숨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된 사회경제적 모순이 민중의 분노로 폭발한 이 광주 항쟁의 바깥에 서 있을 수밖에 없던 시인의 내면은 부끄러움과 죄의식으로 물들여진다. 그 죄의식은 깊어져 언어에 대한 불신과 함께 시조차 멀리 하게 만든다.

사랑은 과거로 변하고 현실도피와 자기학대로 시작된 등산은 이 시집에서부터 시의 방향을 ‘산’으로 돌리고 그것에 매달리게 한다. 1996년 제6시집 『야간산행』에서도 이 점은 계속되지만 전과 달리 길은 있지만 언제나 새로운 미지의 길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긍정적 지향으로서의 산을 노래한다. 시인은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2)라고 선언하며 새로운 출발점에서 미지의 세계, 삶의 적들을 향해 정면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해설)

  봄살찐 볼을 만지는 것 같다입안에 쑥 냄새가 돈다노란 산수유 그늘도 펼쳐진다연못가 버들개지도 눈을 뜬다볕은 보송보송하다옷은 가볍고 걸음은 경쾌하다찬 없이 따뜻한 밥과 냉잇국 한 그릇을 받고 싶다차닥차닥 빨랫방망이 소리가 들리던 옛날의 빨래터도 다시 가보고 싶다.

  봄자연에게만 봄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마음에도 그것은 돌아온다인심에도 계절이 있다정치가 싸움판을 걷어내거나경제가 잘 돌아 보통사람의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면 훈풍 부는 봄이 왔다고 한다넉넉하고 화창하면 모두 봄이다그러므로 봄은 우리의 일상에서 제일로 선호하는 비유의 언어이다봄에는 게정게정 불평하는 소리가 싹 사라진다.

  이 시의 맛은 봄을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으로 빗댄 데 있다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봄의 비유로서의 사람은 순박하고 좀 어수룩하다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저기서 기웃거리는 것을 좀 보라무리에 끼어서 한눈도 팔고 궂은 데서 뒹굴기도 한다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줄을 모르고 한량처럼 나자빠져‘ 있기도 한다느려터졌지만 한판 싸움질도 하는 것을 보니 강퍅하니 나름으로는 고집도 센 듯하다대처를 떠도느라 산전수전 다 겪었다몸고생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그러나 사람 냄새가 나는 그는 마침내‘ 돌아온다민주주의의 도래처럼격전지에서 생환한 용사처럼봄의 백성이 되어 꿈에도 못 잊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품으로.

  이성부(66) 시인은 남성의 굵직한 목소리를 지닌 민중시인이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울수록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라고 쓴 시 는 민중서정시의 한 경지를 보여주었다광주 출신의 그는 ’80년 광주를 겪은 후 죄의식으로 방황을 하다 산()에서 정신적인 위안을 얻는다그는 산행을 통해 처음에 울적하게 막혔던 것이 나중에는 쾌함을 얻는다라는 퇴계의 글귀에 공감하게 되었다고 한다근년까지는 지리산과 백두대간을 종주한 경험으로 내가 걷는 백두대간‘ 연작시를 발표했다.

그가 돌아오고 있다오늘은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오는 봄을 마중 나가자들길과 거리와 사람 사는 동네에그리하여 이 세상에 봄볕 그득할 때까지

(참고문헌)

이성부 [李盛夫] – 공동체 의식에 근거한 민중적 세계관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나무이야기)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중 50(조선일보 연재, 2008)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

(편집부) 2000hans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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