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시인 장석남 사진 (google image에서 발췌)
(장석남 시인)
장석남(張錫南, 1965년 8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인천광역시 덕적도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교수(2003~)로 재직 중이다. 신서정파로 분류되기도 한다.[1] 장석남의 스승인, 시인 오규원은 장석남의 시를 “김종삼과 박용래의 중간 어디쯤이다. 귀중한 자리다.”라고 평했다.[2]
(수상경력)
1992년 제11회 「김수영문학상」
1999년 제44회 「현대문학상」
2010년 제10회 「미당문학상」
2012년 제23회 「김달진문학상」
2013년 제28회 「상화시인상」
2018년 제18회 「지훈문학상」
2018년 제28회 「편운문학상」
(저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문학과지성사, 1991)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문학과지성사, 1995)
《젖은 눈》(솔, 1998) ISBN 89-8133-278-9; 개정판(문학동네, 2009)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 2001)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2005)
《뺨에 서쪽을 빛내다》(창작과비평사, 2010)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2012)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 2017)
(해설)
원래 세상에는 ‘경계선‘이 없다. 자연은 질서 있게 마련된 기준선, 경계선 없이 물 흐르듯 햇살 내리쬐듯 번진다. 여름과 가을엔 경계선이 없다. 녹음이 번져서 단풍이 될 뿐이다. 목련꽃(봄)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된다. 우리는 봄과 여름을 일정한 기준을 두고서 구분하지 않는다. 목련꽃이 지는 것을 보고서 아, 여름이 오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꽃은 번져 열매가 된다. 식물학적으로는 수정이 이루어져 씨방이 발달해 열매가 되지만, 어디까지나 학문의 관점에서 기준을 정해둔 것이지, 자연이 그런 기준을 갖는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기는 때를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하는 것으로 보는 것 역시 학문의 관점에서 정한 기준인 것처럼.
학문과 지식에도 경계선이 따로 있지 않다.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된다. 물리학이 번져 화학이 되고, 철학이 번져 형이상학이 되고, 토목공학이 번져 도시공학이 된다. 이과와 문과를 나눈 것도 교육 과정을 구분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한 것일 뿐이지, 세상의 학문을 분류하기 위해 기준을 세운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너는 네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내게로 번진다. 네가 한 이야기, 너와 같이했던 기억, 네가 내게 미친 영향 모두 지금의 나와 앞으로의 나의 한 부분을 이룬다. 사람은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인간(人間)은 직역하면 사람 사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번져야 산다. 그리고 사람의 가장 큰 감정인 사랑 역시 번진다.
삶과 죽음에도 경계선은 모호하다.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은 다시 말해 죽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람이 죽는 것을 볼 때, 그가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판단하는가? 숨을 쉬지 않는가? 의식이 없는가?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는데? 심장이 멈췄다고 해서 바로 그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닐 거다. 죽음 역시 삶과 기준선을 맞대고 존재하는 개념은 아닌 것 같다. 죽음은 삶의 끝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의 탄생이기도 하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 결과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남아있는 자들에게 귀감, 위인, 이념, 롤모델이 되어 그들의 삶을 환히 밝힌다. 그런 거창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일상적이고 별 것 아니라고 느껴지는 것에 대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가 나에게 베풀고 쏟았던 자애(慈愛)를 되새기고, 그에 대한 감사를 느낀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깃발을 꽂아주기도 한다. ‘한강의 기적‘이란 것은 한 지도자의 뛰어난 리더십이 있었던 덕이기도 하지만, 자식과 후대를 위해 괴롭고 각박하고 간난(艱難)하더라도 견디고 버티며 악착같이 일해 지금의 사회를 일구어낸 이전 세대의 덕이 더 크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그들의 업적과 덕은 그들이 죽은 후에 더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또 한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시간의 흐름도 경계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시간도 지나고 보면 덧없이 흘러간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시간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는다. 꾸준히 흐르며 세상을 진행시키는 시간은 우리가 변하고, 성장하고, 살아가는 토대다.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자연의 모든 것은 순환하여 나무판자가 되었다가, 흙이 되었다가, 석탄이 되었다가, 나비의 더듬이가 되기도 한다. 과학적으로 보든, 종교적으로 보든 맞는 말이다. 사람도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이 죽어 땅에 묻히면 썩어서 풀과 나무가 성장하기 위한 양분이 된다. 그 풀과 나무를 이용해 사람과 동물은 살아간다. 그들이 다시 죽어 양분이 되고, 다시 풀과 나무가 자라고― 봄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다시 봄이 찾아온 것이다.
번짐, 실로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출처)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58』(조선일보 연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