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7)  사평역(沙平驛)에서(1983), 곽재구(1954 ~ )

애창시(7)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1954 ~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시인 곽재구 사진 시인 곽재구 사진

(시인 곽재구)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현대문학을 전공했다. 현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후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토착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연인들』에 이르기까지 초기 시 세계는 현실의 거대한 폭력에 대한 분노와 그 아래서 고통받는 민중들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들은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도시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하면서도 그는 비루한 그들의 삶에 피어 있는 조그만 들꽃을 발견해내는 섬세한 눈을 가지고 있다.

첫 시집 『사평역에서』에서 시작하여 『서울 세노야』에 이르기까지 그는 현실에서 억압 받는 삶에 대하여 서정적으로 노래해왔다. 이들 시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처럼 80년대를 겪은 이들에게 분노는 근본 감정이다. 80년대를 노래했던 많은 시들이 그저 분노에 찬 절규와 외침으로 끝나버린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곽재구 시인의 시들은 그 분노를 아름다운 시어들을 통해 가슴에 와닿도록 절절하게 깊이 있는 정조로 노래했다.  민주화시대를 거치면서 『서울 세노야』 이후 곽재구의 시는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넘어서 인간 본래의 순수성과 사랑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남루한 현실, 힘겨운 현실을 노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현실과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시집으로는 첫 시집 『사평역에서』(1983)를 비롯하여 『전장포 아리랑』(1985), 『한국의 연인들』(1986), 『서울 세노야』(1990), 『참 맑은 물살』(1995),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 『와온 바다』(2012) 등을 간행한 바 있으며, 시선집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2011) 등이 있다.

 

 

[해설]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막차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부려둔 보따리나 꾸러미에 기대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웅크린 채 쿨럭이기도 한다. 털모자에 잠바를 입은 사내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곽재구 시인의 데뷔작 ‘사평역에서’(1981)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아름다우면서 서럽고, 힘들지만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지난 시절의 희망과 절망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모래처럼 톱밥처럼. 그 울컥함이 소설(임철우 ‘사평역에서’), 드라마(TV문학관 ‘사평역’, ‘길 위의 날들’), 노래(김현성 ‘사평역에서’)로 장르를 달리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게 했으리라.   이십대에 쓴 시답게 감각과 묘사가 풋풋하다. 깜깜한 유리창에 쌓였다 녹는 눈송이들은 흰 보라 수수꽃(라일락꽃)빛이다. 사람들이 그믐처럼 졸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확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난로 속 불빛은 톱밥을 던져 넣는 청색의 손바닥과 대조를 이룬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소리는 ‘눈꽃의 화음’을 강조하고, 뿌옇게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회억(回憶)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한줌의 톱밥을 던지는 ‘나’는 무슨 사연을 간직한 걸까? 기다리는 막차는 올까? 모든 역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한 지나감이고 경계이다. 하여 모든 역들이 고향을 꿈꾸는 것이리라. 사평은 나주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 사평에 사평역이 없다니, 그토록 울컥하게 했던 사평역이 어디에도 없다니, 그래서 더욱 우리를 울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어린이용 동화 『아기참새 찌꾸』 이외에도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1993)을 비롯하여 기행산문집 『곽재구의 포구기행』(2002), 『곽재구의 예술기행』(2003), 『길귀신의 노래』(2013) 등이 있다. 1992년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으며, 1996년 제9회 동서문학상을 받았다.

 

[참고문헌]
– 곽재구 [郭在九]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시집『사평역에서』(문학과지성사, 1983)-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7』(조선일보 연재, 2008) –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6』(국립공원, 2007)

(편집부) 2000hans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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