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70)
방심(放心)(2005) 손택수(1970~ )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 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약력)
1970년 전남 담양 태생. 부산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며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부산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출판사 자음과 모음, 이지북 등에서 일했고, 현재는 실천문학사 대표를 맡고 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과 동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2003)으로 묶인 초기의 시편들은 시인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을 중심으로 내성(內省)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한편, 주변 삶을 관찰하는 시인의 눈길을 잘 보여준다. 외할머니의 말씀을 그린 「놋물고기 뱃속」과 작고한 아버지의 추억을 되살린 「송장뼈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또 아버지를 통하여 자신을 투영한 「아버지와 느티나무」 「아버지의 등을 밀며」 등은 고단하고 가난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길과 삶을 오롯이 껴안는 점에서 시인의 진정성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런가 하면 「옻닭」에서 보이는 아버지와의 갈등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시적 경향은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2006)에서 더욱 구체적인 경험의 확대와 그 시적 형상성에 대한 다양한 접근 방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강이 날아오른다」, 「내 목구멍 속에 걸린 영산강」, 「오줌 뉘는 소리」, 「추석달」, 「목도장」등에서는 흙, 바다, 항구 등을 배경으로 가난했던 유년의 기억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목련전차」, 「부산에 눈이 내리면」, 「장생포 우체국」, 「가덕도 숭어잡이」등에서는 가난한 사내와 아내의 이야기 등 민중적인 삶의 모습들이 특유의 구술적인 어법으로 포착되어 있다. 그리고 설화나 전설에서 따온 신비한 이야기들과 함께 불교적인 우주관을 깨닫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는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시인의 심원한 시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 이후 『목련전차』(창비, 2006),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 2010), 『선천성 그리움』(문학의 전당, 2013) 등을 냈으며, 청소년을 위한 도서인 『바다를 품은 책 자산어보』(아이세움, 2006), 『단군』(한솔교육, 2009) 등도 있다.
산문집 『다시 희망에 말을 걸다』(공저, 북오션, 2013)를 펴낸 바 있다. 2002년 제2회 부산작가상, 2003년 제9회 현대시동인상, 2004년 제22회 신동엽창작상, 2005년 제2회 육사시문학상 신인상, 동년 제3회 애지문학상, 2007년 제14회 이수문학상, 2011년 제3회 임화문학상, 2013년 제13회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해설)
‘마음을 놓다‘라는 말, 참 오랜만이다. 마음을 풀어 놓아 버린 일 얼마나 오래되었나. 마음 졸이며 염려하고 살아왔을 뿐. 시인은 대청마루에 큰 대(大)자로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최대한 마음과 몸을 느슨하게 하고서. 바다처럼 편편하고 넓게 퍼져서. 그런데, 스윽, 칼날이 지나가듯 제비가 공중을 한 층 횡으로 서늘하게 자르면서 지나간 모양이다. 손가락을 퉁기는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에 벌어진 기습처럼.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민첩한 한 줄기 바람으로.
집과 나의 중심부를 뚫고 지나갔으니 급소(명자리)를 맞은 듯 어이없고 어리둥절해서 말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체험은 얼마나 시원한 것인가. 체증(滯症)이 가신 듯했을 것이다. 마음을 꼭 붙들어 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마음을 사방으로 허술하게 경계 없이 풀어놓는 것으로서 우리는 마음의 열림을 얻기도 한다. 그것이 무방비의 미덕이다. 좀 게으르게 혹은 별 준비 없이 멍청하게 있다가 한번쯤 당해보기도 해보라. 그런 당함에는 오히려 소득이 있다. 마음의 앞뒤 문을 다 열어놓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을 볼 수 있었겠는가. 마음을 조급하게 각박하게 쓰느니 차라리 이처럼 마음에 장애를 아예 만들지 않음이 오히려 ‘심심(深心)’이요, ‘정(定)’에 가깝다.
손택수(38) 시인은 긍정심이 아주 많은 시인이다. 다른 존재들의 ‘빛나는 통증‘을 그의 시는 받아 안는다. 그의 시는 그가 어렸을 때 그곳서 자랐다는 전남 담양 강쟁리 마을을 배경으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곳 마을 사람들의 천문(天文)적인 상상력은 그의 시에 들어와 크게 빛을 발하면서 그만의 새로운 서정을 만들어낸다. “별이 달을 뽀짝 따라가는 걸 보면은 내일 눈이 올랑갑다“(‘가새각시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와 매달 스무 여드렛날은 “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흙들이 마구 부풀어오르는 날“(‘달과 토성의 파종법‘)이자 “땅심이 제일 좋은 날“이라며 밭에 씨를 뿌리러 가던 할머니의 상통천문(上通天文)이 자주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콧구멍에는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혼쥐로 살고 있다는 믿음, 임신한 몸으로 시큼하고 골코롬한 홍어를 먹으면 태어날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진다는 믿음 등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한 마을에서 자연 발효된 이런 금기사항은 우리 시에서 어느덧 희귀해진 것이어서 각별하고 값지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안마시술소에서 구두닦이를 할 때 안마시술소 맹인들에게 시를 읽어주면서 시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시영 시인은 그를 “송곳니로 삶을 꽉 물고 놓지 않는, ‘고향의 기억‘을 잊지 않는 오랜만의 생동하는 민중서사적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역린(逆鱗)’을 생각한다. “물고기 비늘 중엔 거꾸로 박힌 비늘이 하나씩은 꼭 있다고“(‘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하는데, “유영의 반대쪽을 향하여 날을 세우는 비늘“인 역린을 생각한다. 그의 시에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생(生)을 펄떡이게 하는, ‘뽈끈 들어올려주는‘ 힘이 있다. 시에 있어서 가장 든든한 원군(援軍)은 역시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준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손택수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0』(조선일보 연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