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74)
절벽(1930년대) 이상(1910∼1937)
꽃이 보이지 않는다. 꽃이 향기롭다.
향기가 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묘혈 속에 나는 들어앉는다.
나는 눕는다. 또 꽃이 향기롭다. 꽃은 보이지 않는다.
향기가 만개한다. 나는 잊어버리고 재차 거기 묘혈을 판다.
묘혈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묘혈로 나는 꽃을 깜빡 잊어버리고 들어간다.
나는 정말 눕는다. 아아. 꽃이 또 향기롭다. 보이지 않는 꽃이―보이지도 않는 꽃이.

(약력)
(작가 이상)
본명은 김해경(金海卿). 본관은 강릉(江陵). 서울 출신. 아버지는 김연창(金演昌)이며, 어머니는 박세창(朴世昌)으로 2남 1녀 중 장남이다. 3세 때부터 부모 슬하를 떠나 통인동 본가 큰아버지 김연필(金演弼)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를 거쳐 1926년동광학교(東光學校 : 뒤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병합), 1929년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각혈로 기사의 직을 버리고 황해도 배천(白川) 온천에 요양 갔다가 돌아온 뒤 종로에서 다방 ‘제비’를 차려 경영하였다. 이 무렵 이곳에 이태준(李泰俊)·박태원(朴泰遠)·김기림(金起林)·윤태영(尹泰榮)·조용만(趙容萬)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小說家仇甫氏)의 1일(一日)」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카페 ‘쓰루[鶴]’, 다방 ‘무기[麥]’ 등을 개업하였으나 경영에 실패하고 1936년 구본웅(具本雄)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彰文社)에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퇴사하였다.
그 해 6월을 전후하여 변동림(卞東琳)과 혼인한 뒤 곧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1937년 사상불온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그 해 4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 활동은 1930년『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 1931년 일문시(日文詩) 「이상한 가역반응」·「파편의 경치」·「▽의 유희」·「공복」·「삼차각설계도(三次角設計圖)」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하였다. 이어 1933년『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꽃나무」·「이런 시(詩)」·「거울」 등을, 1934년『월간매신(月刊每申)』에 「보통기념」·「지팽이 역사(轢死)」를, 『조선중앙일보』에 국문시 「오감도(烏瞰圖)」 등 다수의 시작품을 발표하였다.
특히, 「오감도」는 난해시로서 당시 문학계에 큰 충격을 일으켜 독자들의 강력한 항의로 연재를 중단하였던 그의 대표시이다. 시뿐만 아니라 「날개」(1936)·「지주회시(蜘蛛會豕)」(1936)·「동해(童骸)」(1937) 등의 소설도 발표하였다.
이상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를 풍미하던 자의식 문학시대에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 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문학에 스며 있는 감각의 착란(錯亂), 객관적 우연의 모색 등 비상식적인 세계는 그의 시를 난해한 것으로 성격 짓는 요인으로서 그의 개인적인 기질이나 환경, 그리고 자전적인 체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그의 비극적이고 지적인 반응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반응은 당대의 시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국 시의 주지적 변화를 대변함과 동시에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그러한 지적 태도는 의식의 내면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시세계에 도입하여 시상의 영토를 확장하게 하였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억압된 의식과 욕구 좌절의 현실에서 새로운 대상(代償) 세계로 탈출하려 시도하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정신을 논리적 사고 과정에서 해방시키고자 함으로써 그의 문학에서는 무력한 자아가 주요한 주제로 나타나게 된다. 시 「거울」이나 소설 「날개」 등은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시 「오감도」는 육체적 정력의 과잉, 말하자면 발산되어야 하면서도 발산되지 못한 채 억압된 리비도(libido)의 발작으로 인한 자의식 과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대상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역설에서 비롯되는 언어적 유희는 그의 인식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독특한 방법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억압받은 성년의 욕구가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원고향인 유년시대로 퇴행함으로써 욕구 충족을 위한 자기방어의 메커니즘을 마련하였고, 유희로서의 시작(詩作)은 그러한 욕구 충족의 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인간 모순을 언어적 유희와 역설로 표현함으로써 시적 구제(詩的救濟)를 꾀한 시인이었다.
기타 시작품으로 「소영위제(素榮爲題)」(1934)·「정식(正式)」(1935)·「명경 明鏡」(1936) 등과, 소설 「봉별기(逢別記)」(1936)·「종생기(終生記)」(1937), 수필 「권태(倦怠)」(1937)·「산촌여정(山村餘情)」(1935) 등이 있다. 유저로 이상의 시·산문·소설을 총정리한 『이상전집』 3권이 1966년에 간행되었다.
(해설)
아마도 시인은 꽃이 핀 것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꽃잎이 둥글게 열리는 것과 꽃의 둘레를 달무리처럼 둥글게 감싸는 향기를 맡고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 둥근 공간에 들어가 자신의 몸을 눕힌다. 죽은 사람의 몸이 놓이게 되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이 묘혈인데, 그처럼 오목하게 파인 곳에 자신의 몸을 눕힌다. 이 시는 시인의 다른 시에 비해 비교적 쉽게 읽히는 편이지만 문제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밝게 만개한 꽃과 비산하는 꽃 향기의 반대편에 차디찬 주검과 서늘한 묘혈을 배치하고 있다. 열린 공중과 유폐된 땅 속, 두 공간은 서로 차단되어 멀리 떨어져 있다. 시인은 이 이격된 거리를 가파르고 낙차가 큰 절벽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에도 병이 든 육체를 바라보는 시인의 황폐한 자의식이 드러나고 있다.
이상은 실험적인 글쓰기를 보여준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기이한 발상과 국어 문법을 파기한 그의 작품들은 당시에도 지금에도 파격 그 자체이다. 절망적인 근대의 시공간을 살아가는 자아의 분열과 의식과잉을 그는 익히지 않고 날것 그대로 드러냈다. 해서 그의 작품들은 수많은 연구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독 불가능한 상태로 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오감도〉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독자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쳐 연재 15회 만에 전격적으로 연재가 중단되었다. (독자들은 이상의 시에 대해 “개수작“, “미친 놈의 잠꼬대” 등의 화포와도 같은 말들을 동원해 비난을 퍼부었다).
시인 이상에 대한 문단의 평가는 온도차가 뚜렷했다. 희대의 문제아였고, 모던 보이였고, 모더니스트였고, 천재작가였으며, “이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고은)이었고, “모국어의 훼손에나 기여한 시인“(유종호)이었으며, 그는 “잉크로 글을 쓰지 않고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썼다“(김기림).
그러나 이상은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미술에 솜씨가 있어 하융(河戎)이라는 이름으로 박태원의 신문연재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를 직접 그렸다. 그의 시는 숫자와 도형의 사용, 공간 분할 등을 보여주는 바, 이것은 그가 한때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수로 일한 전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한국시사연구』(박철희, 일조각, 1980)
『한국현대문학사탐방』(김용성, 국민서관, 1973)
『이상전집』(임종국 편, 문성사, 1966)
「이상론의 행방」(김윤식, 『심상』, 1975.3.)
「이상(李箱)의 이상(理想)과 이상(異常)」(김종은, 『문학사상』, 1973.7.)
「이상문학의 초의식심리학」(정귀영, 『현대문학』, 1973.7.∼9.)
「현대의 언어적구제와 이상문학」(김열규, 『지성』, 1972.2.)
「이상의 인간과 문학」(정태용, 『예술원보』, 1959.10.)
[네이버 지식백과] 이상 [李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4』(조선일보 연재, 2008)
편집인(편집부 2000hanso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