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75)
성북동 비둘기(1968) 김광섭(1910∼1937)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성북도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약력)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이산(怡山). 함경북도 경성 출신. 아버지는 김인준(金寅濬)이며, 3남3녀 중 장남이다.
1917년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 1920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중동학교로 옮겨 1924년에 졸업했다.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대학 불어불문학과에 적을 둔 이헌구(李軒求)와 친교를 맺었으며, 이어 정인섭(鄭寅燮)과 알게 되어 해외문학연구회에 가담하였다. 1932년 대학졸업 후 귀국하여 1933년 모교인 중동학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하여, 1941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3년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문화 및 정치의 표면에서 활동하였다. 중앙문화협회의 창립, 전조선문필가협회 총무부장, 민주일보 사회부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출판부장, 민중일보 편집국장, 미군정청 공보국장을 거쳐, 정부수립 후에는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공보비서관을 지냈다.
이후에는 주로 경희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자유문학가협회를 만들어 위원장직을 맡고, 『자유문학(自由文學)』지를 발행했다. 그가 문학에 뜻을 갖게 된 것은 대학시절 이헌구와 교분을 맺으면서부터인데, 1927년에는 와세다대학의 우리 나라 학생 동창회지인 『R』에 시 「모기장」을 발표했다.
1933년 『삼천리(三千里)』에 「현대영길리시단(現代英吉利詩壇)」을 번역, 발표했고, 같은 해 시 「개 있는 풍경」을 『신동아』에, 평론 「문단 빈곤과 문인의 생활」을 『동아일보』(1933.10.2.)에 발표했다.
이어서 1934년 『문학(文學)』에 「수필문학고(隨筆文學考)」, 『조선문학(朝鮮文學)』에 「현대영문학에의 조선적 관심(朝鮮的關心)」을 발표하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활발한 문학활동을 전개했다.
본격적으로 시작(詩作)에 들어선 것은 1935년 『시원(詩苑)』에 「고독(孤獨)」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시는 일본에 의해 주권을 상실한 좌절과 절망을 읊은 것이었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동경(憧憬)」·「초추(初秋)」 등이 있는데, 만주사변을 배경으로 한 고독·불안·허무의식이 배경이 된 것들이었다. 1937년 극예술연구회에 참가, 연극운동에 가담하면서 서항석(徐恒錫)·함대훈(咸大勳)·모윤숙(毛允淑)·노천명(盧天命) 등과 교유했다.
1938년 제1시집 『동경(憧憬)』을 간행했다. 광복 후에는 민족주의 문학을 건설하기 위해 창작과 단체활동을 병행했다. 이 무렵의 시로는 「속박과 해방」·「민족의 제전」 등이 있는데, 광복의 환희와 민족의식을 표현한 것이었다.
한편, 계도적인 민족주의 문학론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경향신문』에 「정치의식과 문학의 기본이념」(1946), 『민주일보』에 「문학의 당면 임무」(1946), 『만세보(萬歲報)』에 「민족문학의 방향」(1947), 『백민(白民)』에 「민족문학을 위하여」(1948)·「민족주의 정신과 문학인의 건국운동」(1949) 등을 발표했다.
이러한 일련의 시론(時論)들은 그의 시정신과 동일한 맥락을 이루는 것이었다. 1949년에 간행된 제2시집 『마음』과 1957년에 간행된 제3시집 『해바라기』의 시는 민족의식과 조국애가 더욱 확대되고 심화된 시편들이었다.
작품 「마음」은 맑은 물과 백조의 조응을 통하여 한 생명의 실상을 읊은 것이고, 「해바라기」는 높은 이념을 해로써 상징하고 민족의 지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후기의 작품들은 1966년에 간행된 시집 『성북동 비둘기』와 1971년 간행된 『반응(反應)』에 수록되었는데 전자에서는 병상에서 터득한 인생·자연·문명에 대한 통찰과 아울러 1960년대의 시대적 비리도 비판하였고, 후자는 사회성을 띤 시들로서 1970년대 산업사회의 모순 등을 드러내고 있다.
이 때의 시편들은 관념이 예술적으로 세련, 승화되어 관조와 각성의 원숙경을 보여준다. 그는 민족적 지조를 고수한 시인이며, 초기의 작품은 관념적이고 지적이었으나, 후기에 이르러 인간성과 문명의 괴리현상을 서정적으로 심화시킨 시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70년 문화공보부예술상, 같은 해 국민훈장모란장, 1974년에는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이 밖에 저서로는 『김광섭시전집』(1974)과 번역시 『서정시집(抒情詩集)』(1958) 등이 있다.
(해설)
그는 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을 반대한 애국교육자, 광복 후 중앙문화협회를 창립한 우익 문단의 건설자, 이승만 대통령 공보비서관을 지낸 정치인, 언론사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으로 현대사 100년을 정말 ‘산’처럼 살았다. 실제로도 그는 늘 산을 향해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뎄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속으로 간다”(〈산〉), “목마른 아스팔트를 옆으로 빠져서/ 나는 계절이 풀리는 산으로 간다”(〈산바람처럼〉).
‘남포 깐다’ ‘남포 튼다’는 말이 있었다. 남포란 다이너마이트를 이르는 말이다. 이 개발 저 개발로 너도나도 산업화의 역군이었던 60~70년대 내내 대한민국 전역에 이 산 저 산을 깨는 남포 소리 울려 퍼졌었다. 산을 깎아 돌을 채취하고 도로를 만들고 빌딩을 올리곤 했다. 뻥 뻥 남포를 까면 산에 살던 뭇 짐승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강에 살던 뭇 물고기들은 기절을 하기도 했다. 뻥 뻥 남포 까는 소리에 밤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로,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이 산동네, 달동네로 몰리던 시절이었다. 이 시의 창작 배경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돌 깨는 소리가 채석장에서 울리면 놀라서 날아오르는 새들, 그러나 저것들이 우리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 줄 것인가. 돌 깨는 산에서는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집들은 모두 시멘트로 지어서 마음 놓고 내릴 장소도 없는 저것들이란 데 생각이 머물렀어요.” 고혈압으로 쓰러져 투병하던 중 성북동 집 마당에 앉아 하늘을 돌아나가는 비둘기떼를 보고 착상했다고 한다.
성북동 산과 산동네가 개발되면서 산비둘기는 둥지를 빼앗겼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인간들이 산을 깨는 것과 비둘기들 가슴에 금이 가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제 산비둘기들은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그렇게 쫓긴 산비둘기들이 거리로, 광장으로, 고가 밑으로, 옥상으로, 창턱으로 흰 똥을 찍찍 내갈기며 뒤뚱뒤뚱 걸어다니고 있다. 산동네, 달동네 사람들도 그렇게 내쫓기곤 했다. 재개발과 산업화와 도시화와 문명화의 이면이었다. 유심초가 부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노래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저녁에〉)라는 시를 읊조려 보는 아침이다
(참고문헌)
「김광섭론」(김현승, 『창작과 비평』, 1969.봄호)
「김광섭론」(정태용, 『현대문학』, 1967.4.)
[네이버 지식백과] 김광섭 [金珖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5』(조선일보 연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