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78) 일찍이 나는(1981) 최승자(1952년 ~)

애창시(78)

 

일찍이 나는(1981)     최승자(1952년 ~ )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행복
당신그대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최승자
시인 최승자 사진 (blog.naver.com에서 발췌)

 

(시인 최승자))

충남 연기 출생고려대 독문과를 졸업하였다『문학과 지성』 1979년 가을호에 「이 시대의 사랑」외 4편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등장했다.

최승자의 시는 삶에 대한 절망의 언어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그러나 이것은 절망 그 자체로의 깊은 함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통하여 더욱 강한 삶의 의지를 말하고자 하는 시적 의지를 담고 있다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81)에서는 이 시대가 파괴해 버린 삶의 의미를 천착하면서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향해 절망적인 호소를 하고 있다이 호소는 하나의 여성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사랑과 자유로움을 위한 언어적 결단이기도 하다두 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1984)에서는 극한적인 상황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찬란히 빛을 발하는 삶의 비극성을 그려낸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삶에 대한 철저한 긍정에 도달하기 위해 세계 전체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수행하는 최승자의 시작 방식을 두고 방법적 절망이라 평하기도 한다인간과 희망과 사랑에 대해 전체 아니면 무라는 비극적 전망을 궁극에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다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이로운 시 세계를 일궈내고 있기 때문이다.

3시집 『기억의 집』(1989)에서는 시를 씀으로써 시를 극복한다는 또 하나의 역설적 전략을 만들어 낸다시로 인하여 알게 된 세상의 극한적인 절망을 견뎌 내고 그 속에서 시를 만들어 내는 동력을 다시 시 쓰기를 통해 확보하는 시인의 전략은 진정한 강함과 희망을 희구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절망에 대한 찬란한 수사와 역설적인 열정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를 아울러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학력사항)
고려대학교 – 독어독문학 학사

(작품목록)
이 시대의 사랑해남 대흥사에서즐거운 일기, Y를 위하여, 기억의 집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주변인의 초상, 즐거운 일기(日記), 내 무덤푸르고하늘이었으면서, 어떤 나무들은연인들

최승자

 

(해설)

시인은 여전히 컹컹거린다./ 그는 시간의 뼈를 잘못 삼켰다.”(〈시인〉)라며 시인의 기본 성깔을 운운한 그녀는 삶의 고통과 세계의 위선을 거리낌 없이 폭로했다오직 자기 모욕과 자기 부정과 자기 훼손의 방식을 통해서.

이 시에도 폐광과 같은 유폐와 자기 방기가 있다시인은 곰팡이와 오줌 자국과 죽은 시체에 자기 존재의 흔적을 견준다. ‘라는 존재는 세상의 귓가를 정처 없이 떠돌다 사라지고 마는 영원한 루머일 뿐이라고 말한다자신의 삶을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감히 말하며 아예 내 존재의 근거를 박탈해 버리려는 이런 듣기 거북한 발언은 그녀의 다른 시편에서도 흔하게 있다그녀에게 이 조건 반사적 자동 반복적삶의 쓰레기들.// 목숨은 처음부터 오물이었다.”(〈미망(未忘혹은 비망(備忘) 2)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아주 보잘것없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이런 발언에는 위선의 세계에 대한 강한 혐오와 저주가 깐질기게 숨어 있다그녀는 이 세계가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 병들어 있다고 보았다세계가 비명으로 가득 차 있고탐욕의 넝마이며치명적인 질환을 앓고 있는데 누군들 그곳서 생존을 구걸하겠는가그러므로 내 존재를 루머도 없게 치워 달라고 할밖에.

그러므로 이 시에서 그녀가 독하고 날카로운 비유를 동원해 본인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고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은 일종의 위악의 방식이다이 부패한 지상에서 더 이상 썩지 않으려고 부정하는 법을 그녀는 선택한 것이다.

세월은 길고 긴 함정일 뿐이며 오직 슬퍼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서슴없이 말하던 시인. ‘허무의 사제‘ 최승자 시인은 세상을 혹독하게 앓고 시를 혹독하게 앓았다시로써는 밥벌이를 할 수도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고독의 창 앞에 쏟아부을충분한 피“(〈미망(未忘혹은 비망(備忘) 13)로 시를 써냈다.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어둠의 자손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예요.”(〈자화상〉라고 읊었다그녀는 《빈센트빈센트빈센트 반 고흐》《자살 연구》《침묵의 세계》 등 주옥 같은 역서를 낸 능력 있는 번역가이기도 하다그녀는 지금 병환 중이라고 들었다그래서 그런지 그녀가 세상에 내놓은 신작시를 찾아 읽기가 쉽지 않다끔찍하게 독한 그녀의 시가 그립다그녀가 밤새 짜낸 치욕의 망토로 귀멀고 눈멀은‘ 우리들은 따스함을 얻겠지그녀가 시 〈삼십세〉에서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라고 쓴 것을 읽고 기이한 쾌감을 느꼈었던 것처럼.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최승자 [崔勝子]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78(조선일보 연재, 2008)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8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편집인(편집부2000hans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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