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82)
해바라기의 비명(1936) 함형수(1914~1946)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시인 함형수)
함경북도 경성 출생.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弗敎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이때 서정주(徐廷柱)와 김동리(金東里)를 알게 되어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이 되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중퇴하고 만주로 건너가 소학교 훈도 시험에 합격하여 도문공립백봉우급학교(圖們公立白鳳優級學校)에 근무하기도 하였다.
광복 당시 고향에 머물러 있었으나, 심한 정신착란 증으로 시달리다가 죽었다. 살았을 때 시집은 출간하지 못했고,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과 《자오선(子午線)》에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형화(螢火)〉 · 〈홍도(紅桃)〉 · 〈그애〉 · 〈무서운 밤〉 · 〈조개비〉 · 〈해골(骸骨)의 추억(追憶)〉 · 〈회상(回想)의 방(房)〉 · 〈유폐행(幽閉行)〉 · 〈손있는 그림〉 · 〈부친후일담(父親後日譚)〉 · 〈성야(星夜)〉 · 〈구화행(求花行)〉 · 〈신기루(蜃氣樓)〉 · 〈교상(橋上) 의 소녀(少女)〉 · 〈자전차상(自轉車上)의 소년(少年)〉 · 〈어떤 애사략(愛史略)〉 등 17편이 실려 있는데, 이 중 〈해바라기의 비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년행(少年行)’ 시편이다.
그밖에 《동아일보》신춘문예당선작 〈마음〉(1940. 1.)과 〈개아미와 같이〉(人文評論, 1940. 10.) 등이 있다. 내 무덤 앞에 빗돌을 세우지 말고 노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는 〈해바라기의 비명〉은 그의 대표작으로 문학사에 자주 인용되고 있다.
(수상내역)
1940년 :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마음》 당선
(해설)
1936년 11월 시전문지 《시인부락》(창간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副題)가 달려 있다. 정열적인 삶을 추구하는 젊은 화가를 시적 화자로 내세워 생명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단호하고 힘찬 어조로 형상화함으로써, 《시인부락》 동인들의 생명파적 특징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전5행 단연으로 이루어진 자유시로 내재율을 지니고 있다. 시의 제재는 해바라기이며, 주제는 정열적인 삶에 대한 열정 또는 죽음을 초월한 예술혼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이 넘치는 해바라기를 소재로 강렬한 생명에의 의지를 낭만적이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표출한 열정적·낭만적 성격의 서정시이다. 표현상의 특징으로는 각 시행의 길이가 점차적으로 길어진 점과 모든 시행에 명령형 종결어미를 사용해 강렬하고 절실한 호흡을 느끼게 함으로써 주제의식을 강하게 부각시킨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해바라기의 노란색과 보리밭의 푸른색을 대비시킨 강렬한 색채효과를 통해 더욱 생생하고 풍성한 생명의식을 느끼게 한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미 죽은 청년 화가 L이 자신의 죽음을 노래하는 형식을 취한 5행의 짧은 이 시는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전제되어 있으므로, 시적 화자는 죽은 청년 화가 L이라고 할 수 있다. 제1행에서 시적 화자는 죽음과 인습에 대한 강한 거부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자신의 무덤 주위에 노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고 노래한 제2행은 후기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vanGogh)의 《해바라기》라는 그림을 연상시키는 구절로, 정열을 상징하는 해바라기를 통해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제3행에서는 풍요로운 생명력을 표상하는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고 노래함으로써, 생명의 충일함을 통해 죽음을 초월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제4행에서는 자신의 무덤가에 심어진 해바라기를 ‘늘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으로 생각해줄 것을 당부한다. 마지막 제5행에서는 보리밭 사이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를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며, 꿈을 키우며 살던 자신의 삶이 영원하기를 소망한다.
묘지의 모습을 한폭의 그림처럼 연상시키는 이 시의 제목 ‘해바라기의 비명’은 죽음(생명의 부재)을 의미하는 차가운 비석 대신 불멸의 생명감을 상징하는 해바라기로 비문(碑文)을 대신한다는 뜻이다. 이 시는 사변적(思辨的)이며 소년적인 감상과 애수를 주조로 하는 개성적인 시인으로 평가되는 함형수의 대표작으로, 1930년대 후반기의 시문학사에 자주 인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함형수 [咸亨洙]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82』(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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