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88) 낙화(1963), 이형기(1933~2005)

애창시(88)

 

낙화(1963)                                      이형기(1933 ~ 2005)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시인 이형기 사진 (google image에서 발췌)

 

 

(약력)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태어났다진주농림학교를 거쳐 1956년 동국대학교 불교과를 졸업한 뒤 《연합신문》 《동양통신》 《서울신문》 기자《대한일보》 정치부장·문화부장《국제신문》 논설위원·편집국장등을 지냈다이후 한국문인협회상임이사 등을 거쳐 부산산업대학교와 모교인 동국대학교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대한민국문학상예술원상은관문화훈장서울특별시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1949년 《문예》에 시 〈비오는 날〉이듬해에 〈코스모스〉 〈강가에서〉 등이추천되어 문단에 최연소 등단 기록을 세웠으며, 1962년 《현대문학》에 평론 〈상식적 문학론〉을 연재하면서 시뿐 아니라 평론 분야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다초기에는 삶과 인생을 긍정하고 자연섭리에 순응하는 서정시를 쓰고후기에는허무에 기초한 관념을 중심으로 날카로운 감각과 격정적 표현이 돋보이는 시를발표하였다.

한국문학가협회상(1959), 문교부 문예상(1966), 시인협회상(1976), 한국문학작가상(1982) 등을 받았다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적막강산》(1963), 《돌베개의 시》(1971), 《꿈꾸는 한발》(1975), 《절벽》(1998), 《존재하지 않는나무》(2000), 수필집 《서서 흐르는 강물》《바람으로 만든 조약돌》(1986), 평론집 《감성의 논리》(1976), 《한국문학의 반성》(1980) 등이 있다.

 

 

(해설)

꽃이 지고 있다손에 꼭 쥐었던 것을 놓아버리고 있다어떤 꽃의 낙화에는 만행을 떠나는 수행자의 뒷모습이 있다미련 없이 돌아서기 때문에 낙화에는 구차함도 요사스러움도 없다아쉬움이 없을 리 없다이별은 등 뒤를 허전하게 만들고며칠 눈물을 돌게 할 것이다그러나 제때에 떠나감은 말끔하고 쾌적하다.

새잎이 돋고줄기가 힘차게 뻗고꽃이 벙글고벌이 꽃의 외곽을 맴돌고비로소 어느 아침에는 꽃이 하롱하롱‘ 지고꽃의 시간을 구구절절 기억하며 열매가 맺히고,…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 큰 운행을 벗어나기 어렵다.

부귀는 빈천(貧賤)으로 바뀌고만남은 이별로 바뀌고건강은 늙고 죽음을 초래한다시시각각 바뀐다그래서 이런 것에는 견실성이 없다견실성이 없으므로 집착할 것이 못 된다불교에서는 온갖 사물은 다 없어질 것이어서 공중의 번개 같고굽지 않은 질그릇빌린 물건썩은 풀로 엮은 울타리모래로 된 기슭과 같다고 했다이형기(1933~2005) 시인의 초기 시에 속하는 이 시는 집착 없음과 아름다운 물러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형기 시인은 1950년 시 〈비오는 날〉을 잡지 《문예》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그때 그의 나이 17최연소 등단기록이었다. “()란 본질적으로 구축해 놓은 가치를 허무화시키는 작업이야시에 절대적 가치란 없어자꾸 다른 곳으로 가는 팔자를 타고난 놈들이 시인이야그 무엇이건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정신의 자유 말이야.” 그는 시 창작뿐만 아니라 소설평론시론수필 등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인 창작활동을 펼쳤다초기에는 자연 서정을 선보였으나 현대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악마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시 세계로 나아갔다그는 한국시사에서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 미학을 선보였다.

빈 들판이다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가물가물 한 가닥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신의 함정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역시 혼자다.”(〈길〉)

고독과 고통은 시인의 양식이라고 말했던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랜 투병생활을 했다그러나 고통스런 병석에 있으면서도 그는 아내의 대필로 시를 계속 창작했다그는 슬픔에 휩싸인 사람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아포리즘을 남겼다. “슬퍼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그때는 슬퍼해 봐도 물론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슬퍼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슬픔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런 슬픔은 가장 순수하고 따라서 값지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이형기 [李炯基] (두산백과)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88(조선일보 연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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