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90) 추일서정(1947), 김광균(1914~1993)

애창시(90)

 

추일서정(秋日抒情)(1947)                                 김광균(1914 ~ 1993)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길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간다.

 

김광균
(시인 김광균 시인) (news.joins.com에서 옮김)

 

 

(약력)

북한 출생

저자 김광균은 1914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개성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가했고 이육사윤곤강 등과 동인지 『자오선』을 간행했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설야」가 당선되었다. 50년대부터 기업경영에 전념하며 한국경제인연합회 이사한국무역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80년대 후반부터 다시 작품활동을 재개했다시집 『와사등』 『기항지』 『황혼가』 『임진화』시전집 『와사등』 등이 있다.

13세의 나이에 중외일보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조숙한 시인은 드물게도 실업계에 진출하였다가 80년대 후반에 다시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금융 경제계나 의사가 적잖은 미국시단과는 달리 김광균은 한국시단에 있어서 하나의 예외가 되고 있다짙은 페이소스 속에 선명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시들이 인상적이다.

김광균

(해설)

김광균(1914~1993) 시인은 1930년대 후반 회화적 이미지즘의 새로운 문법을 선보였다그는 시에 회화(?)’라는 웃옷을 입혔다모더니즘 시론가 김기림은 소리조차를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시인이라고 평했다.

김광균의 시는 독자들의 눈앞에 한 장 한 장의 데생을 그려 보이는 작법을 구사했다이런 데에는 김광균이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많은 화가와 직간접적으로 교우한 영향이 컸다김광균은 고흐의 그림을 처음 접한 충격을 이렇게 고백했다.

고흐의 수차(水車)가 있는 가교(假橋)’를 처음 보고 두 눈알이 빠지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낀 것도 그 무렵이다그때 느낀 유럽 회화에 대한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하다세계미술전집을 구하며거기 침몰하는 듯하여 나는 급속히 회화의 바다에 표류하기 시작했다시집보다 화집이 책상 위에 쌓이기 시작했고내 정신세계의 새로운 영양(營養)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 같다.”

그는 섬세한 감각의 촉수로 구름은보랏빛 색지(色紙우에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뎃상〉)로 표현했고흰 눈이 내리는 모습은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설야〉)로 표현했고성교당(聖敎堂)의 종소리는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로 빛나게 노래했다.

마치 먼지 낀 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시에서도 그는 공허하고 고독하고 스산한 마음을 모양으로 번역해 인상적으로 드러낸다시인은 낙엽을 보면서 망명정부에서 발행하는 무가치한 지폐를 떠올리고폐허가 된 도룬(토룬()의 공백(空白)한 하늘을 떠올린다구불구불한 길은 구겨진 넥타이잎이 다 떨어진 포플러 나목(裸木)은 초라한 근골불투명하고 얇은 구름은 세로팡지(셀로판지)’로 표현함으로써 아주 구체적으로 대상을 조형한다.

낙엽을 망명정부의 무용한 지폐에 비유하거나공장의 지붕을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빨에 비유하는 대목에서는 도시적 문명에 대한 시인의 비판 의식도 엿볼 수 있다이 시에 나타나는 황량한 심사는 모색(暮色그득한 그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자주 나타난다이러한 상실감과 창백한 감상(感傷)은 가족들의 죽음실향 등의 정신적 외상에서 비롯되었다해서 혹자는 김광균을 엘레지의 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26년 12세의 나이로 중외일보에 처음 시를 발표하면서 천부적인 시안(詩眼)을 자랑했던 김광균 시인은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한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납북된 동생의 사업을 인수해 사업가로 변신했다그렇지만그는 안개 자욱하던 한국 시단에 장명등(長明燈하나를 켜 놓았다아직도 그곳서 가늘고 고단한 불빛이 새어나오며 밤을 밝히고 있다.

(참고자료)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0(조선일보 연재, 2008)
(『기항지』정음사. 1947 :『김광균 전집』국학자료원. 200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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