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91) 거짓말을 타전하다(2006) 안현미(1972~)

애창시(91)

 

거짓말을 타전하다(2006)                                                       안현미((1972 ~ )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도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까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거짓말 같은 시를!

 

거짓말을 타전하다

 

(약력)

안현미 (1972년 ~ )는 대한민국 시인이다. 1972년 강원도 태백 에서 태어나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를 졸업했으며, 2001년 문학동네 에 신인상을 받으면서 등단했다.
등단: 2001년 문학동네 신인상
성별: 여성
출생: 1972년강원도태백
학력: 서울산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해설)

2006년에 엮어낸 그의 첫시집 《곰곰》은 이렇게 소개되었다. “활짝 핀 착란의 찰나에서 건져 올린 생짜의 시시라니!”라고그의 시를 읽는 일은 막장에서 석탄을 캐내던 내 아버지“(〈고장난 심장〉)와 까치밥처럼 눈물겨운 엄마“(〈우리 엄마 통장 속에는 까치가 산다〉)의 틈바구니에서 생짜로 캐낸캄캄한 그러나 반짝이는검은 조개탄을 들여다보는 일만 같다.

누구에게나 젊은 날의 비망록은 있는 것이어서그 비망록이 어둡고 고통스러울수록 그 젊음은 젊었음이 틀림없다이 시는 시인의 젊은 날의 초상이다여상산동네등록금비키니 옷장순대국밥번개탄연탄가스 중독헌책방 따위로 그려지는 90년대면서도 여전히 70년대적인‘ 풍경이다.

거기에는 짐작되는 아픔이 있고 헤아려지는 가난과 고독이 있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라고 반복적으로 말할 때, ‘~이었지만을 경계로 앞 문장은 뒤 문장에 의해 뒤집힌다경계는 해체된다.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라고 말할 때앞 문장은 뒤 문장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라고 말할 때도 앞 문장은 뒤 문장에서 무참히 무너진다이렇게 앞과 뒤는 가파르게 반전하지만 사실은 동어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리듬감은 여기서 살아난다.

시인에게 거짓말은 의 다른 이름이다그것은 진실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다그러므로 거짓말을 타전하다라는 말은 목마른 시인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팔리지 않는 위독한 모국어로 시()를 쓰고 있었다“(〈그해 여름〉)의 다른 표현이며그의 시에서는 거짓말을 제조하다환을 연주하다(보다), 몽유병에 꽂히다착란에 휩싸이다 등으로 변주된다.

그런데나를 울게 하고 결국은 가족이 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란 무엇에 대한 은유일까야행성의 창녀들일까사내들일까불안이나 공포일까죽음일까…… 어쨌든 그녀의 더듬이는 쓴다 우우우 그녀의 더듬이가 운다“(〈거짓말을 제조하다〉). 그것은 진행형이다.

(참고문헌)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1(조선일보 연재, 2008)
시집『곰곰』(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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