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92) 참개를 털면서(1997) 김준태(1948~)

애창시(92)

 

참깨를 털면서(1997)                                    김준태(1948 ~ )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갱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약력)

전라남도 해남 데뷔1969년 전남매일 신춘문예 등단

용남고등학교 교사

전국교사협의회 영암군지부 지부장

전남고등학교 교사

학다리고등학교 교사

1988신북중학교 교사

광주과학고등학교 교사

전남일보 편집국

1996.09 ~ 1997.12 광주 매일신문 편집국 부국장

1991.11 광주 매일신문 편집국

1996 ~ 1998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초빙교수

1998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

2011.01 10대 5.18 기념재단 이사장

 

(해설)

아아광주여 무등산이여죽음과 죽음 사이에피눈물을 흘리는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우리들의 아들은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우리들의 귀여운 딸은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중략)/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아아 통곡뿐인 남도의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5·18광주항쟁을 최초로 형상화한 이 시 〈아아 광주여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썼던 시인이 바로 김준태(60) 시인이다.

이 시는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 1면에 일부 게재되었고전 세계 외신을 타고 나라 밖으로도 알려졌다이 시 발표 후 전남매일은 강제 폐간되었고김준태 시인은 재직하던 전남고교에서 해직되었다이 일례는 그의 문학적 이력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하다진보적 문인인 김준태 시인은 시를 통해 대동세상(大同世上)에의 열망을 노래해왔다.

남도의 입심을 잘 살려가며 시를 써내는 김준태 시인그의 시 세계의 원적(原籍)은 농민시이다첫 시집 《참깨를 털면서》에서도 그랬고그 이후 발표한 〈밭시〉 연작에서도 그랬다. “칼과흙이 싸우면어느 쪽이 이길까// 흙을찌른 칼은어느새흙에 붙들려녹슬어버렸다“(〈칼과 흙밭시() 52). 그는 흙의 건강한 생명력을 강하게 신뢰하는 시인이다.

시 〈참깨를 털면서〉는 김준태 시인의 데뷔작이다밭에서 할머니와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가 참깨를 털고 있다할머니는 깻단을 슬슬 막대기질 하지만, ‘는 산그늘이 내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조바심을 낸다명령하듯 깻단을 한번 내리치면 복종하듯 솨아솨아 쏟아지는 깨알들이 기막히게 신기하고 신이 난다그예 모가지까지 털다가 꾸중을 듣는다목숨 가진 것에 대한 조금의 외경도 포용도 없이 무턱대고 털어대는 쾌감에 정신없으니 왜 혼나지 않겠는가이 시를 읽으면서인간의 본직을 잘 잊고 사는 나도 할머니 곁에서 참깨를 털며 한 차례 꾸중을 듣고 싶어진다참깨농사뿐만 아니라 사람농사까지 원융(圓融)하게 지어온 그 할머니로부터 꺼끌꺼끌한 사투리로 꾸중을 듣고 싶어진다.

준엄한 역사의식으로 당대에 대응해 우직하게 노래하는 김준태 시인의 또 다른 관심사는 통일문학이다말을 구부리거나 곧은 문장을 비틀어서 만든 시가 아니라 심장을 싸늘하게 감싸는‘ 시를 찾는다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안테나의 촉수가 쉴 새 없이 작동되어야 하고 상황이 타전이 되어 오면 재빠르게 이웃에게 알려주어야 하는 혹은 예언의 나팔을 불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이름하여 시인이 아니던가.” 현실로부터 비켜서지 않는 그의 열정은 폭포수 같다 할 것이다.

(참고자료)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2(조선일보 연재, 2008)
(『참깨를 털면서』.창작과비평사. 1997)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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