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94) 가지가 담을 넘을 때(1996) 정끝별(1964 ~)

애창시(94)

 

가지가 담을 넘을 때(1996)                  정끝별(1964 ~ )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더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시인 정끝별
시인 정끝별 사진 (google image에서 발췌)

(약력)

1964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과와 同 대학원 졸업.

1988년 《문학사상》에 〈칼레의 바다〉외 6편의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이 당선되어 등단저서로는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과 『흰 책』,『삼천갑자 복사빛』『와락』과 시론평론집으로 『패러디 시학』『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오룩의 노래』 그리고 산문집으로 『행복』『여운』『시가 말을 걸어요』 등이 있음현재 이화대학교 국어국문과 교수로 재직 中

 

 

(해설)

정끝별 시인의 시는 경쾌하다언어에 용수철 같은 탄력이 있고 집중력 있게 나아간다그녀의 시는 불붙는 것을 읽어내는 솜씨가 있다시적 대상이 갖고 있는 상반된 성격을 동시에 읽어내는 놀라운 수품(手品). 하나 속에 들어있는 상반된 성격의 팽팽한 대립을 말할 때 그녀의 시는 유니크(unique)하다그녀의 시는 모임과 빠져나감격렬함과 멸렬함달아남과 풀어줌 등 이 세상의 모든 시적 대상이 아마도 갖고 있을 상반된 두 성격한데 엉킨 두 성격을 표현한다해서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열망을 추슬러서 세상 안으로 돌아와 자리잡을 때 정끝별의 시에는 물기가 번지고 리듬이 인다“(소설가 김훈의 말).

이 시에서도 시인은 허공에 혹은 담장에 맞닥뜨린 가지의 엉킨 두 마음을 읽어낸다사람에게도 그렇듯이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감행의 신명이 공존할 것이다다만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는 혼연일체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그것을 범박하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이 사랑의 배후로써 우리는 금단과 망설임과 삶의 궁기(窮氣)를 넘어선다사랑 아니라면 어떻게 한낱 가지에 불과한 우리가 이 세상의 허공을허공의 단단한 담을허공의 낙차 큰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정끝별 시인은 시 <나도 음악 소리를 낸다>에서 우리의 삶은 조율되지 않은 건반 몇 개로 지탱하고” 서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낡아가는 악기는 쉬지 않고 음악소리를 낸다나 딸 나 애인 나 아내 나 주부 나 며느리 나 학생 나 선생 응 나는 엄마 그리고 그리고 대대손손 아프디아픈 욕망의 음계전 생을 손가락에 실어 도레토 라시토 미미미“. 이 시에서처럼 그녀의 시는 삶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그것을 딛고 나아간다길의 상처를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는 타이어의 둥근 힘처럼조율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도레토 라시토 미미미가 없다면 우리 삶의 악보는 진혼곡 그 자체일 터그녀의 시가 각별한 것은 도레토 라시토 미미미의 음계를 연주하는이 특별한 식미(食味)에 있다.

바람을 표절하고싱싱한 아침 냄새를 표절하고나무를 쪼는 딱따구리의 격렬한 사랑을 표절하는 불굴의 표절작가가 되고 싶다는 정끝별 시인그녀의 시는 봄나물처럼 생기발랄하다부럽게 상큼한 맛으로 그녀의 시는 우리의 입맛까지 살려준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며 지친 이의 마음에 숟가락을 쥐여주는 이 시는 얼마나 푸근푸근한가.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밥이 쓰다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중략)/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밥이 쓰다>).

 

시인 정끝별

 

(참고문헌)

【웹진 시인광장 국내 시선詩選ㅣ현대시】멜랑콜리커의 발 – 정끝별 ■ 2018년 513일 e-메일 |작성자 웹진 시인광장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4(조선일보 연재, 2008)

(『몸에 피는 꽃』.창작과비평사. 199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시선집『제23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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