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95)
인파이터 – 코끼리군의 엽서(2006)
이장욱((1968 ~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병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템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기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약력)
출생지 서울특별시
데뷔 1994.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작품이 당선
1968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작품이 당선되어 시인으로, 2005년 《문학수첩》 작가상에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문단에 데뷔했다.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2000년대 한국 시단에서 미래파 논쟁을 주도했으며, 그 자신 미래파에 속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적 작업은 현실과 환상, 진실과 거짓, 실체와 유령을 분간할 수 없는 기묘한 시공간을 정밀하게 구축하면서 새로운 서사의 문법을 실헙하고 있다. 「고백의 제왕」, 「아르마딜로 공간」, 「기차 방귀 카타콤」, 「안달루씨아의 개」 등의 초기 소설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장편소설 『천국보다 낯선』(2013)은 1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장이 바뀔 때마다 매번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 사건과 장면이 변주된다. 이와 같은 다중 화자 전략을 통해 행위라는 것이 하나의 시건으로 고정되어 이야기로 발전하게 된다는 전통적 서사원리를 거부한다. 어떤 상황을 하나의 국면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그 유동성을 소설의 입체성과 대화성을 통해 확보하고 있다.
시집 『정오의 희망곡』(2002)과 『생년월일』(2011)에서는 불연속적인 의미의 문장들과 짧게 스쳐 지나가는 듯한 이미지들을 교차시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적 공간 속에서 일상이 숨기고 있는 기묘한 낯선 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전통적인 서정시의 외형을 허물고 재래의 익숙한 서정과 정형화된 시의 문법을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서정의 세계를 구축해냄으로써 2000년대 미래파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민음사, 2002),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2006), 『생년월일』(창비, 2011)이 있으며, 소설집 『고백의 제왕』(창비, 2010)과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문학수첩, 2005), 『천국보다 낯선』(민음사, 2013) 등을 발표했다. 산문집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창비, 2005), 평론집 『혁명과 모더니즘』(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등을 펴냈다. 2003년 제8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했다.
(학력사항)
고려대학교 – 노어노문학 학사(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 박사(졸업)
(경력사항)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수상내역)
1994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당선
2005년 작품명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 《문학수첩》 작가상 당선
2003년 제8회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작품목록)
천국보다 낯선
(해설)
이장욱(40) 시인의 시는 몽롱하다 아니 명쾌하다. 난해하다 아니 낯설다. 좀 다르게 말해보자. 그는 낮을 사는 시인이다 아니 밤을 사는 시인이다. 그는 시인이다 아니 소설가다. 노문학자다 아니 (픽션)에세이스트다 아니 비평가다. 현대시 모더니티의 한 극점에 서 있는 ‘우울한 모던보이‘다, 아니 서정시의 안부(內部)를 공략하는 ‘진정한 인파이터‘다. 짐작하겠지만, 그는 그 모두이면서 단지 문학 그 자체이다. 이 시의 묘미도 이런 어울림에 있다. 대화와 독백, 여기저기서 끌어온 문장들의 인용과 변용, 절망을 농담으로 받아치는 경쾌함, 뜬금 없고 돌연한 조증(躁症)과 울증(鬱症)의 변주, 비극적이면서 냉소적인 다변(多辯)으로 날렵하게 치고 빠지는 잽이 장기인 시이다.
파이터!라는 말은 자극적이다. 인파이터! 라고 듣는 순간 단전에서부터 전의(戰意)가 꿈틀거린다면 당신은 사각의 링 위에서 난투극을 벌여본 적이 있거나 벌이고 있는 자다. 외곽을 돌면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아웃파이터이거나 상대에게 바짝 달라붙어 저돌적인 공격을 퍼붓는 인파이터일 것이다. 1982년 겨울,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인파이터 맨시니의 강펀치를 맞고 맞고 또 맞으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던 복서 김득구, 그 경기에서 김득구는 분명 맨시니보다 더 인파이터였다. 그러나 김득구는 오는 펀치를 피해 되받아치는 카운터 펀치, 그 한 방의 나이스 펀치를 날리지 못했다.
“코끼리를 천천히 허물어지는 코끼리를/ 그대는 본 적이 있으십니까. (…) 그의 거대한 육체가/ 황폐하지 말라 황폐하지 말라 중얼거리듯/ 무심하지만 지극히 섬세한 자세로 무너져가는/ 그 아늑한 풍경을“(〈코끼리〉). 김득구는 그렇게 무너졌다. 가출해 구두닦이를 전전하다 헝그리 복서로 막 인생이 피려고 할 그때, 14회전까지 계속 얻어맞았지만, 그때까지 버텨온 김득구의 드림, 김득구의 땀과 눈물, 김득구의 피로, 김득구의 공포…김득구는 살아 생전 술을 마시면 노래했다. “권투란 무엇인가, 맞는 걸까, 때리는 걸까“.
이 사각의 링에서 그 누군들 단 한 방의 펀치도 맞지 않으면서 단 한 방의 카운터 펀치를 노리는 아웃파이터가 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야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일 뿐, 이름하여 ‘인파이터 코끼리군‘. 우리는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저 모호한 구름에 너무 바짝 붙어 싸우고 있는 게 틀림없어! 우리 삶이란 게, 그렇게 허무맹랑한 싸움임에 틀림없어!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이장욱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5』(조선일보 연재, 2008)
(『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200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