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98)
오산 인터체인지(1971) 조병화(1921 ~ 2003 )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식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 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약력)
경기도 안성 출생. 호는 편운(片雲).
1929년 경기도 용인 송전공립보통학교 입학하였으나, 서울로 이사하면서 1931년 미동 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1941년에 경성사범학교 보통과를 졸업, 1943년에 연습과를 졸업했다. 1945년 동경고등사범학교 3학년 재학 중 일본의 패전으로 귀국했다. 1945년 9월 경성사범학교 교유, 인천중학교 교사, 서울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9년부터 경희대 교수, 1981년부터 인하대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했다.
1974년 중화학술원(中華學術院)에서 명예철학박사, 1982년 중앙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99년 캐나다 빅토리아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 출간을 시작으로 53권의 창작시집이 있을 정도로 시창작 과정이 성실하게 지속되었고, 이 시집 가운데 25권은 외국어로 번역 출판된 바 있다. 해방 후 경성사범학교(현재 서울대학교)에서 물리교사를 하면서 영문학 강의를 하고 있는 김기림의 눈에 조병화의 시가 띄게 된다. 김기림의 주선으로 장만영 시인이 운영하는 출판사 산호장에서 방황의 시간동안 써내려간 시를 시집으로 묶었고 그 첫 시집이 『버리고 싶은 유산(遺産)』이었다. 평범한 봉급 생활자로 침전해가던 조병화가 시인 조병화로 탈바꿈한 출발이었다. 해방 이후 불모지 국가, 학교에서 정신적인 방황과 고독을 표출한 그의 시세계는 당시 똑같은 정서의 빈곤 안에 놓인 도시민들에게 위로와 정서적 충만감을 안겨주었다.
그림에도 관심이 많아 개인작품 전시회를 여러 차례 가진 바 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했으며, 세계시인대회 국제이사, 제4차 세계시인대회(서울, 1979) 대회장을 겸임했으며, 이 세계시인대회에서 추대된 계관시인(桂冠詩人)이다.
그리고 그가 수상한 여러 문학상의 상금과 그의 원고료는 창작활동을 돕는 기금이 되었다. 1991년부터 편운문학상(片雲文學賞)을 제정하여 이 상을 운영해 오고 있다.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주제로 삼은 조병화의 시세계는 그 속에 깊이 자맥질해서 나그네로서의 삶의 의미를 구현해낸다. 원숙한 삶의 경지를 찾아가는 조병화 시의 목소리는 삶과 죽음을 모두 아우르는데 순수 허무라는 시인의 주장대로 고독한 삶의 전 과정을 함축한 시적 의미를 내포한다.
조병화 시가 많은 대중에게 존재의 의미를 확장시킨 것은 서정의 빈곤성, 비인간적인 현실에 대한 반성과 거리두기와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는 광복 이후 도시 서울시민으로서의 혼란함, 소시민의 고뇌를 『하루만의 위안』(제2시집)에 담아내면서 시적 성취를 이뤄낸다. 언어의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 정감적인 느낌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그의 시언어는 고독한 인생길의 방향을 모색하는 독자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었다.
(상훈과 추모)
아세아문학상(1957)
한국시인협회상(1974)
서울시문화상(1981)
대한민국예술원상(1985)
국민훈장 모란장(1986)
3.1문화상(1990)
대한민국문학대상(1992)
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1996)
5·16민족상(1997)
(해설)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실로 변하는 건/ 사람뿐이다.// 시간에 집을 지으라/ 생각에 집을 지으라// 시간은 마냥 제자리에 있음에/ 실로 변하는 것은/ ‘오고 가는 것‘들이다.”(〈의자 6〉)
조병화(1921~2003) 시인의 시 〈의자 6〉을 읽고서 나는 망연히 물처럼 앉아 있다. 나의 바깥은 바람 가듯 물결 지듯 지나가는 것이 있다. 순간순간이 작별이다. 여관이 여관에 들었다 나가는 하룻밤 손님과 작별하듯이. 허공이 허공에 일었다 잦아드는 먼지와 작별하듯이.
그리고 〈오산 인터체인지〉를 다시 읽는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보인다. 사랑이 갈라서는 것이 보인다. 맞잡았다 놓는 당신과 나의 손을 안개가 물컹물컹 잡아 쥔다. 안개를 두른 당신과 나의 행로에 대해 알 방도가 없다. 나는 동쪽으로 사십 리를 가지만, 당신은 남쪽으로 천 리를 가야 한다. 내가 가야 할 거리보다 당신이 가야 할 거리가 까마득하게 더 멀다. 당신이 나를 떠나 보내는 거리보다 내가 당신을 떠나 보내는 거리가 훨씬 멀다. “자, 그럼“이라는 대목은 또 어떤가. 가슴이 아프다. “자, 그럼“이라는 표현에는 뒤편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단호한 듯 순응하는 듯 “자, 그럼“이라고 말하지만, 그 음색에는 애써 숨긴 슬픔의 기색이 역력하다.
이 시에서처럼 조병화 시인은 단독자인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과 밀통하고 내통했다. 꾸밈이 없는 어투로 그는 생애 내내 우리네 도시인들의 슬픔을 노래했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비밀을 아느냐// 나는 아직 어려서// 슬픔이 나의 빛/ 나의 구원/ 나의 능력“(〈너는 나의 빛〉). 그는 ‘편운(片雲)’이라는 호를 썼다.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의 발간을 계기로 등단한 후 유고시집을 포함해 총 53권의 창작시집과 시론집, 수필집 등 무려 160여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그는 럭비와 그림을 좋아했다. 럭비선수로 일본 원정까지 다녀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에도 상당한 솜씨가 있었다. 여백을 넉넉하게 살린 그림을 즐겨 그려 여러 권의 화집을 냈고 여러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는 시를 쉽게, 빨리 쓰되 한 차례 쓰고 난 뒤에는 그냥 내버려두었다고 한다. (애써 쓴 시를 짐짓 모르는 척 내버려두는 시간은 참으로 적막하였을 것이다.) 내버려 둔 시가 며칠 후에 다시 눈에 밟히면 고쳐 썼고, 눈에 어른거리지 않으면 매몰스레 아예 버렸다고 한다.
박재삼 시인은 “조병화 시인의 시에서는 어디서든 난해한 데라곤 없다. 그저 술술 읽히는 마력(魔力)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시 〈어머니〉도 난해한 데라곤 없다. “어머님은 속삭이는 우주/ 속삭이는 사랑/ 속삭이는 말씀/ 속삭이는 샘“이라고 그는 썼다. 담담하게 말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담담함은 더 감당을 못하겠다. 나직하고 담담하게 말하는 사람의 내상이 더 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 그럼“이라고 말하며 작별을 고하는 사람, 그이에게는 “말도 무용해진다“.
참고문헌
『조병화 한국대표시인101인선집』 (『문학사상』30주년기념출판, 2002)
조병화 문학관(www.poetcho.com)
[네이버 지식백과] 조병화 [趙炳華]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일간『한국 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 98』(조선일보 연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