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정승과 김종서 장군

황희 정승과 김종서 장군


갓 정년 퇴임한 한 교수가 방송출연으로 방송국에 갔다

두리번 거리며 수위 아저씨에게 다가 갔더니..

말도 꺼내기 전에 “어디서 왔어요” 라고 묻더라는 것

소속이 없어진 그분은 당황한 나머지 “집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른 한 교수도  방송국에서 같은 일을 당한 모양이다.그러나 그분은 이렇게 대꾸했다.
어디서 왔냐고” 묻지 말고, “어디로 갈 것인지” 물어보시오.
나 ○○프로에서 출연해 달라고 해서 왔소.

마침 그 프로그램 진행자인 제자가 멀리서 보고 달려왔다.
그 제자는 “역시 우리 교수님 말씀은 다 철학이에요.
우리의 인생에서도 어디서 왔냐보다
어디로 갈 것인가” 가 더 중요한 게 아니겠어요” 라고 말했다.

경기 파주시에 있는 ‘반구정’에는 황희 정승이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돌아가시기 전까지  3년 동안 갈매기를 벗하며 여생을 보내셨다는 유적지다.
그곳 기념관에는 황 정승의 유명한 예화가
소개돼 있다그중에서도 김종서 장군과 관련된 일화가 큰 울림을 준다

김 장군은 일찍부터 용맹을 떨친 호랑이 같은 장수여서 겸손함이 좀 부족했는지  

중신회의에서 삐딱하게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눈에 거슬리지만 누구 하나 말을 못하자 황 정승이 아랫사람을 불러 일렀다.
“장군께서 앉아 계신 모습이 삐딱한 걸 보니 아무래도  의자가 삐뚤어진 모양이다
빨리 가서 반듯하게 고쳐 오너라.

그러저 장군은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런 식으로 가끔 장군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하자

한 중신이 유독 장군에게 더 엄격한 이유를 물었다고 한다.

“장군은 앞으로 나라의 큰일을 맡아서 하실
분이라 혹시라도 장군의 훌륭한 능력을 작은 결점 때문에 그르칠까 염려돼
그러오.

황 정승은 이미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은 늙어 물러갈테고 다음 세대가 뒤를 이어갈 것이기에

미래를 내다본 것마치 지금의 자리가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어디로 갈지 모르고 어디서 온 것만 내세우면 미래가 없다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편집인(편집부2000hansol@hanmail.net)    

가만히 눈을 감으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의 인생을 뒤바꾼 한 맹인 소년과의 만남!

그 후 자원봉사자로 1누나로 6,
약혼녀로 3그리고 아내로 34년을 그의 그림자가 되어 살아왔다.
처음엔 고개를 젓던 사람들도 이젠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찬사 뒤에는 우리 부부의 눈물과 고통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있었다.

“강영우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
우리의 만남은 어쩌면 숙명적이었다.
그가 평생 단 한 번 걸스카우트를 방문한 그때,

나는 걸스카우트 신입 회원으로 그를 돕는 프로그램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마 그때 하느님께서 내게저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는 맹인 중학생이 10년 후 나의 신랑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다면 나는 그대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때 그는 맹학교 중등부 1학년생이었고나는 여대생이었다.

가난과 실명의 고통에 찌든 모습을 상상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학생은 외모만 봐서는
전혀 맹인 같지 않았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그 학생만 힐금 힐금 쳐다보았다.

누군가 그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 다 주고 오라고 했을 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내가 다녀오겠다” 며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 학생의 손을 덥석 잡고 광화문 사거리로 나섰다.

그때 처음으로“ 숙대 영문과 1학년 석은옥이에요” 라며 나를 소개 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그의 지팡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열 네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 1학년 때인 열다섯 살 때 축구를 하다가 공에 눈이 맞아 실명했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실명 때문에 충격을 받아 뇌일혈로 세상을 뜨자
고아가 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장애인 재활원으로여동생은 고아원으로남동생은 철물점으로
재활원을 전전하며 남편은 수년간 방황했다.
자살도 여러 차례 기도했다.

그러나 어느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뒤“갖지 못한 한 가지를 불평하기보다

가진 열 가지를 감사하자” 며 마음을 고쳐 먹었다고 한다.
처음 만날 때는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게 아니어서 남편은 어렴풋이나마 내 젊은 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불빛조차도 구별할 수 없는 완전 맹인이다.

그때부터 주말이면 맹학교 기숙사에 찾아가 책도 읽어주고안내도 해주는 일을 1년 정도 봉사
하다 보니 정이 들어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잘됐다 싶어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당시 나는 그가 투병과 방황으로 여러 해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것을 몰랐다.

그저 대학생과 중학생이라는 것만 생각해 부담 없이 그의 누나가 되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2
년 정도 지나 그의 성적표에 있는 생년월일을 보고 한 살 반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그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양친이 안 계신 동생이 생기니 누나로서 할 일이 정말 많았다.

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면 도시락을 싸 들고 따라가야 했고 빨래장보기부터 대학 진학 준비에 이르기까지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동생을 도와준다는 것 자체가 내게 기쁨이었다.

누나 동생으로 6,
우리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물론 아가페사랑이다.

당시엔 맹인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맹인이 버스를 타려고 하면 차장이 밀어내기 일쑤고,
가게에서는 재수가 없다며 오후에 오라 하고식당에서는 구석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주위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
그와 만난 지 5년째 되던 해그동안 혼자만 생각해온 유학 계획을 그에게 털어 놓았다.
나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는지그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며 반대했다.

나는 좀 당혹스러웠지만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결혼을 해서도 시각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천직으로 알고 계속할 텐데
더 늦기 전에 유학을 다녀와야 겠다는 말에 결국 그도 동의했다.

나는 1967 9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동안 정이 든 그와의 이별은 큰 아픔이었다.
게다가 처음으로 가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겹쳤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누나를 보내고 혼자 힘으로 다가오는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부담과 불안이 겹쳐 이별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내가 떠난 뒤 동생 영우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 먹고 대학 입시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8년 연세대 문과대 교육학과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맹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원서 자체를 접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입학원서조차 낼 수 없다니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미국 땅에서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데 4주 정도 지나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았다.

영문과 교수 한 분이 대필해 주어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교육과에 10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1968 3서울맹학교 고등부에서 연세대에 입학해 그동안 박박 깎은 머리를 기른 채

교복 대신 신사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보내주었다.

정상인들과 같이 공부하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첫 학기부터 장학생이 되었다는
편지가 날아왔다나는 15개월 만에 귀국했다.

그동안의 이별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누나 동생이 아닌사랑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1968년 12 22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함께 연세대 백양로를 걷던 중 영우가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도 그를 무척 좋아한 데다 남은 생을 시각장애인 교육에 헌신하려고 준비해왔는데
그를 반려자로 맞으면 남편에게 맹인 동생을 이해해달라고 할 필요도 없으니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영우의 사랑을 받아주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장래를 약속한 우리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했다.
우리 두 사람은 비밀리에 약혼식을 올렸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둔 홀어머니가 애지중지 기른 딸을 맹인에게 준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지만 결국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친구들은 더 심했다.
어떤 친구는 다시 한번 내 얼굴을 쳐다보며,
“관상을 보면 팔자가 그렇게 센 것 같지는 않은데
하느님이 해도 너무하셨다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학벌이 좋으면 뭐하니?
너는 좋아서 결혼한다해도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식들을 생각해봐.
아버지가 장님인데” 하고 말렸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2 2 26대학생이던 약혼자를 졸업하기까지 만 3년이나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난 다른 친구들에 비해 결혼이 늦은 편이었고,
모두 판사의사약사대기업 간부의 부인이 되어 있을 때 연하인 맹인 학사를 신랑으로 맞은 것이다.
그래도 어찌나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아 하객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였다.

“맹인 아내로서 내가 겪은 고통

1972년 8우리 부부는 가슴에 큰 뜻을 품고 LA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에는 장애가 해외유학의 결격사유에 속했다.

그 항목을 삭제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이 될 때까지 몇년 동안 겪은

마음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편집부(2000hans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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