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창시(10)
사슴 <1938년> 노천명<1912 ~ 1957>
모가지가 길어서 슬픔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노천명 시인]
깔끔하고 “대처럼 꺾어질망정 구리모양 휘어지”지(‘자화상’, [산호림(珊瑚林)], 1938) 않는 꼿꼿한 성격의 소유자 노천명. 그러나 천명은 일제 말기에 다른 많은 문인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대륙 침략정책에 동조함으로써, 문학과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다. 1939년 ‘황국위문사절단원’으로 북지(北支, 중국의 북부 지방)를 순회하고 돌아온 데 이어 1942년 그는 모윤숙, 최정희 등 다른 여성 작가들과 함께 일제가 우리 문인을 회유하기 위해 만든 ‘조선문인협회’에 가입한다. 일제강점기에 그가 남긴 행적 가운데 더욱 결정적인 오점은 1943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문화부에 들어가 일본어로 된 ‘가정란’의 편집을 맡고, 해방을 코앞에 둔 1945년 2월 <매일신보>에서 발행한 제2시집 [창변]에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노래하자 이날을’,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 다수의 친일 시를 수록한 일이다(신경림,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지문사, 1981).
그러나 이 시기에 노천명이 친일 시만 쓴 것은 아니다. 남의 창가를 서성거리며 “기댈 데 없는 외로움”을 노래한 ‘창변’을 비롯해, 어릴 적 고향을 풋풋한 향토적 서정 속에 녹여 회고하는 ‘촌경’, ‘고향’, ‘장날’, ‘푸른 오월’, ‘잔치’, ‘수수 깜부기’ 등에서 그는 첫 시집 [산호림]보다 한걸음 더 나간 성숙한 시 세계를 보인다.
해방 뒤 노천명은 해방 전의 친일 행적에 대한 가책과 문우들의 영향 때문인지 잠시 좌익 단체인 ‘문학가동맹’에 이름을 올리지만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는다. <서울신문사>에 입사해 문화부에서 일하던 그는 이듬해 <부녀신문사>의 편집 차장으로 자리를 옮기나 1947년에 이르러 10여 년 동안의 신문사 생활을 청산한다. 잠시 쉬다가 1948년에 공부 겸 여행차 일본 유학을 시도하는데, 이때 가족의 반대로 밀항하는 곡절을 겪기도 한다. 1년 동안 일본에 머물다가 귀국한 그는 이듬해 안국동 집을 떠나 누하동으로 이사한다. 그는 누하동 집에서 양녀로 들인 인자와 함께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며, 첫 수필집 [산딸기]를 펴내고 1950년 1월 <문예>에 ‘검정나비’ 등을 발표한다.
이윽고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노천명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는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던 그는 북에서 온 임화, 김사량 등과 잠깐 만나는데, 수복 뒤 이 일이 해방 뒤의 ‘문학가동맹’ 가입 사실과 함께 좌익분자 혐의를 가중시켜 자그마치 20년 실형을 선고받고 옥에 갇히는 것이다.
창살 밖으로 우물처럼 깊은 하늘에 날카롭게 그어놓은 듯 하현달이 떠 있는 것이 보인다. 푸른 수의를 입은 몸집이 자그마한 여인의 눈에도 하현달이 상형 문자처럼 떠 있다. 심한 고문과 협박, 열악한 환경을 탓할 여유도 없는 수용 생활. 그는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밭에서 뽑혀 나온 근채류의 식물처럼 늘어져 있다. 오등(五等) 콩밥과 눈물을 함께 씹어 삼키며 그는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고초를 받는 것이냐.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라고 되씹곤 한다. 삶이 고단할수록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한다.
“둥굴레산에 올라 무릇을 캐고 접중화 싱아 뻐꾹채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개두릅을 뜯던 소녀들”의 시절. 고향 황해도 장연 땅,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 순을 꺾다 깨면 꿈이고. ‘사슴’의 시인 노천명. 얼마 뒤 그는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시인 김광섭에게 “3월 2일까지 나를 구하라.”는 명령투의 편지를 보낸다. 김광섭이 누하동 천명의 집에 방 두 칸을 얻어서 살 때의 친분이 이런 결례조차 서슴지 않게 만든 것이다. 문인들이 진정서를 내고, 특히 이헌구와 김상용 등이 석방 건의문을 작성해 검찰청장을 직접 찾아가 전달하는 등 구출 운동에 힘쓴 덕분에 노천명은 1951년 봄에 석방된다.
노천명은 1912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 전택면 비석포리에서 태어난다. 소지주 출신인 그의 아버지가 인천 등지에서 무역업에 손을 대어 성공을 거둔 덕분에 어린 천명은 한동안 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다. 개울가에는 아버지가 심은 아라사 버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고, 뒤울안에는 사과꽃이 피는 풍경. 눈이 내리면 아버지는 노루 사냥을 나가고, 천명은 곳간에서 당(唐)콩(강낭콩의 북한어)을 꺼내다 먹으며 늦도록 아버지를 기다린다.
위로 아들이 하나 있음에도 잇달아 딸이 태어나자 어머니 아버지는 아들 낳기를 몹시 바라 어린 천명에게 사내아이의 옷을 입혀 키운다. 그의 아명은 기선(基善)인데, 여섯 살 되던 해 홍역을 심하게 앓고 난 뒤 천명(天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이것이 호적에 오른다. 서울의 양반 집안에서 장연으로 시집온 어머니는 병약한 천명을 편애하며, [옥루몽(玉樓夢)] 등의 얘기를 들려주어 그의 상상력을 키워준다. 어린 천명은 어머니의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서울 말씨를 몹시 좋아한다.
1918년 아버지가 숨지자 그의 가족은 고향인 황해도 장연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다. 천명은 진명여고보에 진학하게 되는데, 학업 성적이 우수했을 뿐 아니라, 100미터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당시 천명의 육상팀은 전국 대회에서 우승한 적도 있을 만큼 경기력이 뛰어났다. 1930년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할 즈음, 천명은 어머니의 죽음을 겪는다. 게다가 직장 관계로 언니와 형부가 지방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그는 학교 기숙사로 들어가 외롭고 쓸쓸한 학창 시절을 보낸다.
이때의 고독한 생활이 곧 그를 책과 원고지 속에 파묻히게 하고, 같은 해 교지에 천명은 ‘봄 잔디 위에서’라는 시를 싣게 된다. 1932년 그는 <신동아>에 시 ‘밤의 찬미’와 ‘단상(斷想)’, 수필 ‘신록’, 소설 ‘닭 쫓던 개’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이 무렵 노천명은 <이화>지에서 받은 원고료 1원을 언니에게 우편으로 부치는데, 언니는 그가 보낸 1원을 장롱 속에 천금처럼 고이 간직하다가 누렇게 변색되어 못 쓰게 되기도 한다.
이화여전을 졸업한 천명은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부 기자로 들어간 뒤 <매일신보>와 <서울신문> 등의 문화부 기자를 거친다. 그가 시인으로 문단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35년 2월 시원(詩苑)에 ‘내 청춘의 배는’이라는 작품을 발표한 뒤의 일이다. 1938년 그는 처녀 시집 [산호림]을 펴내며 회현동 경성호텔에서 호사스런 출판 기념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천명은 한국의 마리 로랑생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이때가 문학 면에서 보나 인생 면에서 보나 그의 절정기인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 무렵에 키운 필요 이상의 자만심과 아집은 그가 더욱 고독한 삶을 이어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기야 화려한 서장(序章)이었다. 그때 이 나라에선 하나밖에 없었던 여자로서 최고학부를 나오자 모 신문사에 금방 데려갔고 여기서 일을 하는 한편 나는 나이팅게일이 노래를 토하듯이 쉴 새 없이 시를 토했으며 또 용정이니 북간도니 연길 등지로 한바퀴 여행하고 와서는 [산호림]이라는 처녀 시집을 내놓았다. 당시 내 눈은 머언 데로, 높은 데로만 주어졌고 눈앞에 있는 것들은 웬일인지 마땅치 않았다.
천명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다. 결혼을 하지 않을뿐더러 내성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던 그는 연애도 거의 하지 않는다. 보성전문학교 교수인 김광진과의 연애가 그의 삶에 새겨진 유일무이한 사랑의 흔적이다. 1938년 ‘극예술연구회’에서 안톤 체호프의 작품 ‘앵화원(櫻花園)’을 무대에 올렸을 때 천명은 모윤숙과 함께 라네프스카야의 딸 아냐로 출연하는데, 이때 김광진과 알게 되어 연인 사이로 발전한 것이다. 김광진은 유부남이었고, 두 사람은 남의 눈을 피해 만나곤 한다. 나중에 김광진은 본처와 헤어지기로 하고 천명과 약혼까지 하지만, 그 결혼은 끝내 성사되지 않는다. 본처와의 이혼이 지연되면서 천명과 헤어진 김광진은 나중에 기생 왕수복과 월북한다.
이후 천명은 고아인 ‘인자’를 데려다가 친딸처럼 키우며 독신으로 산다. 내성적일 뿐 아니라 오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노천명에게 친구가 많았을 리도 없다. 오래도록 가깝게 지낸 유일한 친구로는 뒷날 ‘공안과’ 원장 공병우 박사의 부인이 되는 학교 동기 이용희를 꼽을 수 있다. 졸업 뒤에도 두 사람은 당시 국회의사당 앞의 ‘청조’ 다방 등에서 만나 시에 관한 얘기를 나누곤 한다. 천명은 얼굴이 조금 얽었는데(얼굴에 마마자국이 생김), 이 때문인지 때때로 이용희의 미모를 몹시 부러워한다. 그는 이용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불쑥 “네 얼굴에 내 글이면 장안에서 인기일 텐데.”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무렵 신경증에 가깝던 노천명의 고독은 길게 목을 뽑고 우아한 향기를 뿜으며 스스로 고고하게 즐기는 고독이 아니라, 험난한 삶의 시련을 겪은 뒤 뼛속 깊이 전해 오는 죽음을 부르는 고독이다.
이후 그는 서라벌예대, 국민대, 이화여대에 나가 강의를 하고 1954년에 두 번째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를, 1955년에 [여성 서간문 독본]을 펴낸다. 아울러 시 창작도 게을리하지 않아 1955년 <사상계>에 ‘어머니’, 1956년 <여원>에 ‘오월의 노래’ 등을 발표한다. 그러나 워낙 몸이 약하던 그는 ‘이화 70년사’를 무리하게 집필하다가 1957년 3월 길에서 쓰러지고 만다.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한 노천명의 병명은 재생불능성 뇌빈혈이었다.
입원비 때문에 궁지에 몰려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문우들이 돈이라도 쥐어줄라치면 천명은 “내가 거진 줄 아니?” 하고 싸늘하게 거절의 뜻을 밝히곤 한다. 단짝인 이용희가 문병을 갔을 때도 천명은 재생불능성 빈혈의 치료비를 벌고자 병실의 벽면에 원고지를 대고 잡문을 쓰고 있다가 친구를 맞는다. 이용희가 파마한 천명의 삼단 같은 머리를 보고 아름답다고 칭찬하자 그는 명랑한 목소리로 “내가 삭발하고 입산한다는 소문 못 들었니?” 하고 농담을 한다. 그러나 천명의 몸에서는 이미 피가 썩어가는 역한 냄새가 감돈다. 문우 모윤숙의 부축을 받아 코로나 승용차로 드라이브를 하고 돌아온 것이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외출이 된다.
얼마 뒤 모윤숙이 해외에 갈 일이 생겨 돌아올 때까지 살아 있으라고 한 당부도 지키지 못한 채 천명은 1957년 12월 10일 새벽 1시 30분에 서울 종로구 누하동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이로써 마흔여섯 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부조리한 삶이 끝난다. “이는 꿈일 게다, 진정 꿈일 게다.”라고 혼잣말을 하는 천명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노천명이 죽은 다음 해인 1958년 6월, 유고 ‘사슴의 노래’와 ‘유월의 언덕’ 그리고 죽기 바로 전에 쓴 ‘나에게 레몬을’ 등 42편을 모아 시집 [사슴의 노래]가 간행되며, 1973년에는 산문집 [사슴과 고독의 대화]가 나온다.
[해설]
이 시는 한 마리의 사슴을 등장시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시인은 사슴의 몸통과 다리를 배제한 채,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처럼 사슴의 목 윗부분을 그려낸다. 관(뿔)을 쓴 ‘높은 족속’으로 스스로를 도도하고도 고고하게 표현하지만, 2연에서는 물리칠 수 없는 마음의 통증을 보여준다. 마음의 통증은 어디에서 연유할까. 노천명은 많은 시편에서 어릴 때의 평온했던 시간으로 귀소하려는 욕구를 드러낸다. “절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우에 돋고”, “삼밭 울바주엔 호박꽃이 화안한 마을”로 시인의 마음은 자주 이끌린다. 그 시간들은 화해와 무(無)갈등과 동화적인 세계이다. 그런 세계를 동경하는 화자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마음의 결손을 유발한다. 그 괴리의 거리와 슬픔의 크기를 시인은 가냘프고 긴 사슴의 목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삶은 고독과 갈등의 경전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몸을 받을 때부터 고독의 의복을 입고 태어났다. 그러나 우리는 고독의 정면(正面)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고독의 시간이라야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를 만날 수 있고, 그때 참회와 기도가 생겨나게 되지만. 해서 모든 종교적인 시간은 고독의 시간이지만. 릴케의 표현처럼 “고독은 비와도 같은 것”이며, “(고독은)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같은 잠자리에서 함께 잠을 이루어야 할 때”처럼 흔하게 찾아오는 것. 너무나 마음 쓸 데가 많아서 도무지 고독할 시간조차 없다고 말하지 말자. 이 시를 애송하는 시간에라도 우리는 우리의 근원적인 고독의 시간을 살자. 나의 자화상을 솔직하게 들여다보자. 고립감이 자기애로 나아가더라도. 설혹 자기애에 빠져 나르키소스처럼 한 송이의 수선화로 피어나더라도. 남빛 치마와 흰 저고리를 즐겨 입었다는 노천명 시인은 한국시사에서 시적 대상을 시적 화자와 겹쳐 놓음으로써 현대 서정시의 동일성 시학을 선보인 최초의 여성 시인이었다.
[참고문헌]
–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나무이야기) –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10] – (「산호림」. 1938: 「사슴 –노천명 시전집」. 솔. 1997)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