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162 대산 성당(복자 구한선 타대오 성지)
2. 미사 시간
주일 : 11:00
화, 목, 토 : 19:30(동절기) / 20:00(하절기)
수, 금 : 11:00
단체 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 (50명 이상 가능)
3. 역사
구한선 타대오 순교
순교복자 구한선(具漢善) 타대오(1844-1866년)의 묘가 확인된 것은 그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후 너무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23세의 꽃 같은 나이로 오직 천주를 모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던진 청년 구한선 타대오. 혹독한 매질을 당한 후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7일 만에 장독(杖毒)으로 선종했고,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하기리 새대[新垈] 마을 입구의 신씨(愼氏)들 묘소 내 구석진 곳에 묻혔다. 그러나 혹독한 박해를 거치면서 순교자의 묘는 고이 보전되기 어려웠고 점차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구한선의 유해도 자칫하면 그 행적조차 묘연할 뻔했으나 천행으로 그 묘소가 확인됨으로써 후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으로 남겨지고 있다. 순교자의 묘는 1959년 당시 함안 본당 주임인 제찬규 신부의 노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찬규 신부는 “치명일기”의 기록을 토대로 순교자의 묘를 찾던 중 대산 공소회장인 윤성학(尹聖學) 바오로의 증언을 듣게 되었다.
윤 바오로 회장은 구한선의 처조카인 최성순을 통해 순교자의 묘가 “신(愼)씨라는 사람의 묘소 안에 있다.”라는 말과 순교자의 아들이 부친의 무덤을 사토(莎土)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이 증언의 내용은 대산면 하기리에 사는 한 노인의 말, 즉 “신(愼)씨 묘소 안에 진주 옥에서 풀려나와 그 장독(杖毒)으로 죽은 사람의 묘가 있다.”라는 말과 완전히 일치했다.
구한선 타대오의 생애
구한선은 경상도 함안 미나리골(현 경남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유학 서적과 잡서를 많이 읽고 요술로 신장(神將) 부리는 법에 관심을 두기도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고는 즉시 이를 받아들여 교리를 배운 뒤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후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는 관장 앞에서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죽음 직전까지 간 그를 포졸들이 거리에 내다 버렸다. 그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교우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왔지만 불과 한 주일 만에 장독으로 선종했다. 죽은 뒤 그의 이마 위에는 ‘품’(品)자로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고 한다.
1976년 5월 8일 준본당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대산 본당은 순교자 신심을 강조하며 그해 9월 외교인의 묘소 안에 있던 구한선 타대오의 묘를 가등산 자락으로 이장하고 돌봐왔다. 그리고 2002년 5월부터 마산교구의 대표적 순교자 중 한 명인 구한선 타대오의 묘를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한편 구한선 타대오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복자품에 올랐다. 마산교구는 시복식과 묘역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 구한선 순교복자의 유해를 인근 대산 성당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하고, 2016년 5월 7일 대산 본당 설정 40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하며 성지 조성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10월 20일 묘지 이장 작업을 진행해 구한선 복자의 유해를 대산 성당 1층에 마련한 무덤 경당 제대에 모시고, 10월 29일 교구장 배기현 주교 집전으로 복자 구한선 타대오 순교성지 기념제단 봉헌식을 거행했다.
4. 교통
대중교통 : 미산역 – 101번, 110번, 113번, 115번 – 석전사거리,합포여중-250-23번 – 대산면사무소 (1시간 10분)
승용차 : 남지IC – 11Km – 대산 성당 – 18분
5. 성지순레 도장
성당 복도
6.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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