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위례산길 394
전화 : 041-584-7199
주일 : 11:00, 평일 : 11:00(월요일 미사 없음)
(피정, 식사 가능(사전 예약 필요함)
1801년 신유박해 이후의 이주기(移住期)에 형성된 성거산 소학골 교우촌과 1830년 대에 형성된 서들골(일명 서덜골) 교우촌은 박해시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피신처요 은신처였다.
특히 소학골은 한 때 칼래 신부님의 사목 중심지로 삼아 활동하기도 하였던 곳이기도 하며, 서들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님의 큰 아버님인 최영렬씨가 1827년 고향 청양 다락골을 떠나 서울 낙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목천 서들골로 이주하여 살았고, 1839년의 기해박해 직후 최양업 신부님의 둘째 동생인 최선정 안드레아가 백부 최영렬의 집으로 보내져 이곳에서 잠시 성장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 교우촌을 중심으로 병인박해 이후부터 계속 생겨난 교우촌들은 점점 통폐합되었다가 1920년에 와서는 7개의 교우촌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박해시 교우촌에서 사목 활동을 하셨던 선교사들
1845년 한국인 사제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이후 박해시기인 1851년부터 1861년 10월까지 이 곳 교우촌에 순방하고 관련을 맺었던 한국인 사제와 프랑스 선교사를 보면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신부, 페롱신부, 권스타니슬라오 신부, 프티니 콜라 신부 등이 사목방문을 하였고, 1861-1866년 10월까지 이어서 조안노 신부, 페롱신부, 칼래 신부 등이 사목방문 및 활동을 하였다.
특히 칼래 신부님은 1864-1866년 10월까지 소학골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삼았다.
병인박해 목천 순교자들
또한 병인박해의 목천 순교자를 보면 1866년 10월(음력) 소학골과 서들골, 주위의 교우촌이 발각되기 시작하면서 계속 포졸들이 덮쳐 이곳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잡혀 모두 23명이나 순교하게 되었다.
소학골 교우촌 9명, 서들골 교우촌 4명, 복구정 교우촌 2명, 베장골 2명, 장자동 4명, 공심리 1명, 목천 1명 모두 23명이나 된다.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에서 옮김)
대중교통:
1호선 천안역 – 택시(38분) -성거산 성지 9요금 21,600원)
승용차 : (경부고속도로) 북천안IC – 성거산 성지 (21분)
순례 성당 입구에 위치